당진읍 시곡리 ‘이정열·김태황’씨


▲ 김태황씨는 비닐하우스에서 이런 모습으로 혼자 일을 하신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김태황(며느리,71)씨는 아직도 맏며느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하고 있다.
벌써 5년째 거동이 불편한 이정열(시어머니,94) 할머니를 간병하면서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긴 오십년 세월을 그저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며 겸손을 내보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벗이 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손하경 기자 sarang418@hanmail.net



아주 특별한 고부(姑婦)

고급빌라를 지나 백여 미터쯤 가면, 마을 어귀에 조립식으로 지어진 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엔 아주 특별한 고부가 산다. 김태황, 이정열 두 할머니가 그들이다.
언뜻 이름만 보아서는 부자(父子)로 오인할 수도 있지만, 김태황씨가 홍씨 일가의 맏며느리로 당진읍 시곡리에서 살아온 지는 50년이 넘었다.


“우리 아버지가 남동생 보라고 내 이름을 이렇게 지으셨어. 그래서 그랬나 밑으로 남동생을 보긴했지... 근디 시집오니까 시어머니 이름도 남자이름이라서 연분인가 했지”
시집을 온 뒤로 줄곧 그 곳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시동생·시누이를 돌보며 남편과 함께 살아왔지만, 지금은 며느리와 시어머니만이 그 집을 지키고 있다.


20년 전 김태황씨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그 뒤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1년 뒤 남편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생전에 우리 아저씨가 너무 착해서 탈이었지. 나한테도 너무 잘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썼는데 결국엔 죽어서 너무 속상했어. 요즘 같았으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의 안타깝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일흔하나 나이든 며느리

김태황씨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벌써 5년째 병상에 계신다. 거동이 불편하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이다. 더구나 청력도 좋지 않아,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황이다.
“엄니! 신문사에서 기자가 왔는디 엄니랑 나랑 사는 모습 찍으러 왔대유” 라며 기자를 소개해 주는 김태황씨에게는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온 시간이 말해주는 듯 시어머니와의 의사소통에 별 무리가 없었고, 눈빛만으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다시 아이가 되어버린 시어머니를 씻기고 식사를 챙기어 먹이면서도 일을 할 때는 밖이 보이는 곳에 모셔두어 바깥 일상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에서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사랑과 배려가 돋보인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앉혀놓으면 앉기도 하고, 걷지는 못해도 엄니가 플라스틱 변기통에 볼일을 봐서 그나마 다행이여. 5개월 전만 해도 꼼짝을 못해서 기저귀를 채웠었지”
그런 며느리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 덕분인지 시어머니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고 있다고 한다.

▲ 며느리 도움 없이 시어머니 혼자서는 음료수도 마실수 없다.


흙으로 물들여진 ‘값진 손’

자신도 이미 칠순을 넘긴 할머니로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힘겨울텐데 지금까지 농사일을 놓지 않고 처녀 시절부터 배웠다는 삼베를 짜며 생활을 꾸리고 있다.
“엄니가 불편하니까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집 근처에서 할 수 있는 농사가 제일이지. 또 지금까지 농사일만 해봐서 다른 일은 생각도 안 해봤어”


집게(검지)손가락 하나가 짧고, 기형이어서 물어보았더니 “처녀 때 바느질을 하다 찔렸는데, 덧이 났는지 안 낫길래 병원에 갔었어. 더 늦었으면 손가락을 절단할 뻔 했다고 하더라고... 근디 수술해서 다행히 그렇게까지는 안됐지...”


그런 손을 보니 그 동안의 고생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손톱에는 흙이 끼어 물이 들어 있었고, 손가락마다 끝은 갈라져 있었다.
“허리가 아픈데... 겨울에 일없을 때 물리치료를 받아봐야 하려나봐”
때로는 자신의 처해진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이 들어 몇 번이고 딴 마음을 먹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2남 2녀의 자식들과 홀로 남겨질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는 홍씨가의 맏며느리 김태황씨.
“예전에 남편도 없고, 죽고 싶을 때가 참 많았지... 근디 이젠 내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살고 있어. 어쩌겠어. 여태 이만큼 살아왔는데,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살아야지...”라며 쓸쓸한 마음을 내보인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그 며느리에 그 며느리

노인의 체력으로는 고된 탓이었는지 최근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는 김태황씨.
병명이 정확하진 않지만 치매와 노인성 정신질환이 겹치면서 밥술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남은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굳은 의지로 병상에서 일어설 수가 있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동안 읍내에 사는 우리 큰며느리가 고생 많이 했지. 내가 병원에 있으니께 나 신경쓰랴, 시할머니 신경쓰랴 애 많이 썼어. 그러니까 우리 엄니한테는 손자며느리인데 요즘에 누가 잠깐이라도 시할머니까지 맡아서 돌봐. 시부모도 싫다는 세상에... 그리고 우리 큰아들도 내가 힘들까봐 집에 자주 와서 농사일을 자기가 다 하다시피 하니까... 둘 다 너무 착해. 그래서 그런가 우리 엄니가 큰손자랑 큰손자며느리만 찾아” 그러면서 아들과 며느리 자랑을 한보따리 늘어 놓았다.


큰아들 내외가 읍내에 있다보니 농사일을 거의 도맡아 한다고 했다.
나머지 자녀들은 외지에 있어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수시로 전화하여 김태황씨와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곤 한다.


어릴적 어머니로부터 보고 배웠을 부모에 대한 공경심과 효심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녀들 스스로의 몸에 스며든 듯 하다.


그래도 우리 엄니가 최고!

옛적에 시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젊은 시절 시집살이로 고생을 해왔지만, 남편을 일찍 여의고 의지할 사람은 그래도 시어머니 뿐이었다. 친정 부모님도 안 계신 지금, 내 부모만큼이나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몸은 불편하셔도 막상 안계시면 허전할 것 같어.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그래도 엄니라도 계시니까 빈집 같지 않아서 좋아. 밤에 잘 때도 한이불 덮고 자. 뭐하러 귀찮게 따로 피고 자. 같이 한이불 덮고자면 편하지... 앞으로 내가 아프더라도 딱 하루 이틀만 앓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물론 내가 엄니보다 먼저가서는 안되지. 우리 엄니랑 이렇게 친구처럼 지내면서 재밌게 살아야지”라며 활짝 웃음을 피워보인다.


핵가족화 되어있는 요즘 시대에 ‘효(孝)’라는 의미를 잊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다.
김태황씨의 시어머니 사랑과 공경을 보면서 다시금 그 의미를 되새겨 우리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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