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공감]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당진공감]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 이선우 작가
  • 승인 2019.05.27 08:00
  • 호수 1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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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30개월쯤 됐을 무렵 모습. 사진이 찍힌 1884년 당시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혔다고 한다.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30개월쯤 됐을 무렵 모습. 사진이 찍힌 1884년 당시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혔다고 한다.

[당진신문=이선우 작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애나멜 구두를 신고 하얀 치마에 깃털 달린 모자를 꼭 움켜쥔 모습. 영락없는 여자 아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진 속 주인공은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으로 30개월쯤 됐을 무렵의 모습이다. 사진이 찍힌 1884년 당시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혔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아이들은 일곱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하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데, 흰 옷감은 때가 타고 더러운 것이 묻어도 다시 표백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하얀 옷을 입히지 않으면 부모들이 잘못이라고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어린이에겐 하얀 옷을 입히는 게 사실상의 규범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아기와 어린이의 옷차림에 대해 연구해온 미국의 역사학자 파울레티 교수의 이야기다. 과거에는 옷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아용품이 하얀색이거나 중성적인 색이었지만 19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아이 옷에 색깔을 넣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남자 아이에게 어울리고, 파란색은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는 색깔이다. 확실하고 더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이 남자 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자 아이들은 연약하고 앙증맞은 색깔인 파랑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191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 년 전 발간된 미국의 한 어린이 잡지에 쓰여 있는 문구다. 같은 해 미국의 한 여성지에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한다. 강렬하고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은 남자아이에게 잘 어울리고, 부드럽고 앙증맞은 파랑은 여자아이가 입어야 더 예뻐 보인다는 맥락의 이야기다.

1927년 11월 <타임>지는 미국의 주요 백화점에서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어떤 색깔 옷을 권장하는지를 표로 정리했다. 보스톤과 시카고, 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남자 아이에게 분홍색 옷을,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색 옷을 권하고 있다. 클리블랜드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에게 핑크색 옷을 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핑크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영조 20년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당상관들은 반드시 핑크색 옷을 입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핑크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영조 20년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당상관들은 반드시 핑크색 옷을 입어야 했다고 한다.

더 이전의 역사 속에서 핑크색은 남녀 구별 없이 사용된 색이다. 르누아르가 그린 그림 속에는 분홍색 비단 셔츠를 입은 신사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숙녀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료들에 대한 복장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했던 조선시대, 핑크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영조 20년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당상관들은 반드시 핑크색 옷을 입어야 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핑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 존재로,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된 것이다. 1950년대 화장품 회사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핑크 마케팅’을 시작했고, “여성=핑크”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모성으로, 때로는 사랑이나 포르노그래피까지 포괄한다.

1960년대 중반, ‘성역할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학습 된다’는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으로 잠시 주춤했던 핑크 마케팅은 뱃속의 아기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별에 맞춰 아이용품을 장만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이분법은 사회의 통념을 지배하는 거대한 줄기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그 수많은 것들 중에 과연 진실로 당연한 것은 얼마나 될까.

“저는 남자 아이다운 것, 여자 아이다운 것을 명확하게 나눠버린 고정관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원래부터 정해져있던 것도 아니니까요. (중략) 우리 애는 사내아인데 늘상 옷을 여자 아이처럼 입으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부모가 여전히 많잖아요. 그것이 결코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패션 업계는 남자 옷, 여자 옷을 구분해서 팔면 매출이 늘어나서 좋을지 모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명백하게 남성성, 여성성을 분간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_ 메릴랜드대 역사학자 파울레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