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열정, 그리고 도전하는 사람들 - 7]
“장애의 벽을 허물고 3년 개근…꿈을 이루다”
[꿈과 열정, 그리고 도전하는 사람들 - 7]
“장애의 벽을 허물고 3년 개근…꿈을 이루다”
  • 신동원 기자
  • 승인 2009.03.02 13:49
  • 호수 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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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학 56세 졸업생 ‘허 복 희’ 씨

지난 24일 신성대학 졸업식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3년 동안 개근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56세 졸업생이 화제가 됐다. 유아교육과 허복희 씨가 그 주인공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3년이라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수업에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을 만큼 그녀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허복희 씨는 이날 졸업식에서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졸업생 대표로 모범봉사상을 수상했다.
언뜻 봤을 땐 나이만 좀 많았지 여느 학생들과 다른 점이 없어 보인 그녀가 상을 받으러 절뚝거리며 걸어 나가는 모습에서 3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학생의 틀을 벗고 당당히 사회로 나가는 그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단연 돋보였다.


시대가 변할수록 학생들의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배움에 대한 열의도 식어가고 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사소한 일에도 수업을 거르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그녀는 그런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많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기자는 장애와 나이의 벽을 허물고 당당히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 허복희 씨를 만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신동원 기자 habibi20@naver.com




# 꿈을 이루다

1953년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격변의 한국사회를 체험한 허복희 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까지가 최종학력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훌쩍 커버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되어버린 허 씨는 50대에 접어들어 이때가 아니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1세의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1년 만에 고입검정고시와 대입검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수능시험까지 거쳐 2006년 신성대학 유아교육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어려서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그래서인지 마음속에는 언제나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어요. 제게 있어 공부는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꿈을 이뤄서 기쁩니다.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삶을 살 수 있잖아요”


이제 졸업과 함께 당당히 사회로 나가게 된 그녀가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가 들고 있는 졸업장은 그 누구의 졸업장보다 소중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게 학교를 다녀서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졸업장입니다. 인내하면서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눈물이 나려고 해요. 꿈을 이뤘잖아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꿈을 향해 도전할 겁니다”

▲ 졸업식장을 찾아온, 허복희씨의 남편과 아들 김원일씨
# 포기하고 싶기도 여러 번…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어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몸이 너무 아파 처음으로 큰 병원에 갔죠.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한쪽 다리가 4cm 짧다는 것을요. 그 때문에 자세가 틀어져 척추가 눌리면서 신경이 눌려 너무 아팠어요. 신경을 죽이는 치료를 받고 지금은 어느 정도 괜찮아졌지만 완치된 것이 아니라서 힘이 들더군요. 그럴 때마다 교수님이 격려 해주시며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허 씨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고 안산에서 당진까지 매일같이 학교 통학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상적인 사람도 힘들었을 법한데 그녀는 단 한 번의 결석도 용납하지 않았다. 행여나 통학버스를 놓치면 곧바로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가 버스를 갈아타며 신성대학까지 통학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면 2~3시간씩 기다려서 다음 버스를 탔다. 겨울이면 너무 춥고 여름이면 너무 더웠다. 하지만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아교육과 특성상 발표도 많이 해야 하고 과제도 컴퓨터로 해야 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간단한 문서작성만 배우고 학교에 왔기 때문에 파워포인트(발표 자료를 제작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어려운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몰랐거든요. 젊은 학생들은 빨리 배우는데 저에게는 너무 어렵더군요.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허 씨는 간단한 리포트를 쓸 때도 젊은 학생들에 비해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시험도 한 과목씩 정리해 1주일동안 들고 살았다. 그 결과 지금은 웬만큼 컴퓨터를 다룰 수 있게 됐으며 3년 동안 과 수석을 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인내하고 참는 것이 몸에 배어 있잖아요. 어렸을 때 아버지도 근면, 성실을 많이 강조하셨고요. 그리고 주위에서 응원하고 지켜봐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없어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미안하잖아요”


# 추억…그리고 미래

뒤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인 만큼 허 씨에게는 남다른 추억이 많이 쌓였다.
“처음엔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이 ‘언니~언니~’하던 게 적응이 안됐어요. 조금 지나서 한 학생이 ‘이모~’하고 부르는데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학생들과 같이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봄이 되면 신성대학 정문까지 늘어선 벚꽃길을 지나 강의실로 가는 길에 파란 제비꽃 무리와 여러 꽃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요. 꽃들을 보며 강의실로 향할 때 학교 방송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의미있는 멘트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죠. 마음이 편해지면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슴 벅차고 좋은 추억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허 씨는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학교 MT가 있는 날은 어김없이 참여해 학생들과 마음을 나눴다. 그녀는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나 학생들이 자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하며 미소를 보였다.


허 씨는 인생에 있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준 신성대학 캠퍼스를 기회가 되면 언젠가 다시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 신성대학은 평범한 대학이 아닌 추억 그 자체이며 꿈을 이룬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 씨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문학사자격증을 취득해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싶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허 씨는 꾸준히 피아노를 쳐왔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이들과 연계해 즐겁게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유아교육과에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현재 취업 준비 중에 있다.
3년 동안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 마무리 하며…

그녀가 무사히 대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데는 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도 한몫 했다.
허 씨가 통학버스를 탈 수 있도록 남편은 출근 한 시간 전에 안산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힘들어 하는 아내를 위해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안산역까지 바래다주었지만 어떨 때엔 나조차도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 씨의 아들인 김원일(27) 씨도 언제나 어머니 옆에서 정신적인 후원자 역할에 충실했다.


“어머니께서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그래도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항상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죠. 어머니를 보면서 삶의 철학을 많이 배웠습니다. 항상 성실, 정직하고 근면하라고 가르치셨죠. 어머니를 보면서 제 삶도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인터뷰 동안 허 씨는 아들자랑을 멈출 줄 몰랐다.
김원일 씨는 동네에서도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만큼 허 씨 곁에서 언제나 든든하게 뒷받침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허 씨는 당진을 떠나 안산에서 앞으로의 꿈을 향해 또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어려움에 닥쳐 포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귀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꿈을 이룬 그녀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본다.




<허복희 씨가 졸업과 함께 후배들에게 남긴 글입니다>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 틈에 끼어서 부족한 바가 많으나 세월을 살아감에 있어서 그래도 나름대로 살아온 철학이 있기에 뭔가 한마디 얘기할 것이 있고 또 그것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1953년도에 태어나 격변의 한국 사회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는 대다수의 우리 세대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에 많은 교육을 받을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였고 저 또한 유년시절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까지 밖에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아버님이 항상 하신 말씀인 정직과 성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신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그 가르침을 토대로 저의 삶은 나름대로 치열하였고 근면, 성실하였으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 나름의 기반은 쌓아 올리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제 마음 속에는 학문에 대한 기반을 통해 정신적인 성찰과 자각능력을 한 단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평생 동안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자기성찰과 자각능력을 키워야 하며 그것을 통한 정신적인 성장이 삶의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삶의 과정에서 나름대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저는 2004년도부터 수험 생활을 시작해서 2005년도에 고입검정고시를 4월에, 대입검정고시를 8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패스하였고, 2005년 11월에는 수능시험을 보았고 신성대학에 과 수석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학교생활도 저에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몸이 불편한 곳이 있는 저는 다리와 허리에 문제가 있어서 제가 사는 안산에서 학교까지는 통학버스와 때로는 직행버스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며 가야 했고 가사일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기에 새벽 5시면 기상해서 아침 식사를 차리고 분주한 아침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에겐 매우 힘든 시간이었으나 그러나 근면 성실하라는 아버님의 말씀과 저 개인적인 철학이 있었기에 한 번도 학교에 빠지지 않았으며 외부적인 여건에 의하지 않고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졸업에서도 평점 4.43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매일아침 통학버스에서 내려서 태촌아카데미홀을 거슬러 본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봄이면 피어난 벚꽃과 목련꽃 그리고 아기자기한 제비꽃무리와 노란 민들레는 나에게 따뜻함과 평안함을 주었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대 교가와 방송반 학생의 의미있는 멘트를 들으면서 자연관으로 올라오는 길은 나에게 대학생활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지금은 유아교육의 전공을 살려서 아이들과 생활하기위해 취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는 활력이 있고 패기가 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든 사람도 나름의 이러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젊은 분들은 마음만 먹으면 저보다 더욱더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나름의 철학이 있으실 것이나 제가 위에서도 얘기했듯 제 삶의 철학도 저 나름의 경험으로는 좋은 것들이라 생각 됩니다. 특히 사고의 유연성과 개인적인 자기성찰과 자각능력은 여러분이 젊었을 때 정립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관점의 시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근면성실하고 부끄럽지 않는 삶도 여러분이 나름의 기준으로 참고한다면 제 경험상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뒤늦게 배움의 길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저의 학교생활이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들도 이제 사회 초년생으로서 많은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여러분의 철학을 완성하고 삶을 살아가시면 어떤 삶을 사시더라도 후회없는 삶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