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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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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봉 송영환
등록일
2010-10-15 04:27:20
조회수
11765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의 유래...

1. 임금은 선조릉에 년간 수차에 걸쳐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만약 거리가 50리 왕복 100리가 넘으면 당일 제사를 마치고 밤 늦게 까지도 돌아 올수가 없어.... 밤사이 궁궐을 비우게 되지요...

그러면 비운 밤사이에 역모를 하여 역적들이 궁궐을 접수 장악할 것을 두려워 하여 ...아침에 일찍 출발하여 제사를 모시고 밤 늦게 까지라도 돌아 올수 있는 거리에 왕릉을 조성하고자 그 거리를 측정하니 그게 용인 못미처 까지 해당되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 시대에는 임금릉이 조성되면 반경 5리 안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묘를 이장해야 함으로.... 그런 위험을 벗어 나자니 결국 한양에서 반경 50리가 넘는 위치인 최소한 용인에 까지는 나와서 묘를 써야 후일 파묘나 이장을 면하기에 당시 한양에 살던 양반가들이 용인지역을 장지로 선호했다는 유래가 있고 ...

또한 진천은 물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이라는 말이 생겨 났다는 설이 있고...

2. 또 한가지 설은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삶과 죽음의 질서를 오가며 생긴 기막힌 사연 하나가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즉,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는 데 하루는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깨었는 데 그 통곡 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에 있던 자기의 아내였고, 곧이어 자식들도 따라 우는 것이었지요.

“왠 갑작스런 울음이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목놓아 울기만 했지요.

“우리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흑흑!”

그는 싸늘하게 누워 있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제야 지금 자신은 혼(魂)이 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멈칫거리다가 곧 이어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으로 인도되어 간 그는 염라대왕 앞에 엎드리게 되었지요.

“어디서 왔느냐?”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라 하는 자입니다.”

“뭐라?”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지요.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지요.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지요.

일이 꼬이려 했던지 두 사람은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지요.

그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이승의 자기 집으로 쏜살같이 내달려 왔는 데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이제는 몸둥아리를 되찾을 수 없게 되어 그는 아내를 연이어 불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지요.

실의에 빠진 채 멍하니 있다가 문득 묘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지요...

바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 번쩍들어 그는 용인으로 냅다 뛰었지요.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엔 다행히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그는 얼른 몸 속으로 들어갔지요.

그렇게 슬프게 통곡을 하던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기뻐 날뛰었지요.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린 그는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설명해 주었으나 여인과 아들딸은 죽음에서 깨어난 헛소리로만 여겨 어떠한 말도 먹혀들지 않자, 그는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내고 다음날로 즉시 진천을 향해 내달렸지요.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고는 붙잡고자 뒤따라 뛰었고 진천 고향집에 도착한 그는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외쳐 댔지요.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녀는 돌아온 남편이라 외치는 남자의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고 오히려 모멸감이 들었고 이에 혼줄을 내주겠다며 이내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았지요.

뒤따라 온 용인 땅 추천석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미쳤다며 계속 용서를 구했지요.

그는 계속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고선 결국 관가로 끌려가게 되었지요.

고을 원님은 그의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는 데....

“진천 땅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금껏 살아서는 진천에서 추천석으로 살았으니 ....‘생거진천(生居鎭川)이요...지금은 진천의 추천석은 죽었는 데 ...다만 용인의 추천석의 몸을 빌렸으니 지금부터는 용인의 추천석으로 살아가야 하니 사거용인(死居龍仁)하라...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고 판결하여 그때부터 이 추천석이 죽었다 살아 나는 사건으로 인하여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생겨 나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요...

그래서 진천의 추천석은 진천의 추천석으로 인생의 반을 ....또 용인에서는 용인의 추천석으로 나머지 반을 살다가 갔다고 하는 군요....

또 다른 여러설이 있지만...이쯤해서 생략하지요...

현재도 충북 진천 땅 입구에 다다르면 ‘生居鎭川’이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는 군요....
작성일:2010-10-15 04:27:20 175.203.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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