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추석명절과 기차
[당진신문 오피니언] 추석명절과 기차
  • 당진신문
  • 승인 2019.09.07 06:00
  • 호수 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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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재 원당중앙감리교회 목사
원당중앙감리교회 박두재 목사
원당중앙감리교회 박두재 목사

[당진신문=박두재 원당중앙감리교회 목사]

추석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추석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5년(인종 23년)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추석은 신라시대 초기에 시작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명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 세시명절로 자리 잡았던 추석은 고려에 와서도 큰 명절로 이어졌고,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추석에 대한 다른 이름이 많다. 중추. 중추절. 가배. 가배일. 가위. 한가위. 중추가절이라고도 부른다. 추석을 한자로 ‘秋夕’이라고 쓰는데, 뜻은 ‘가을 저녁’이다. 여름내 뜨거운 열기에 지친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기 시작하고 높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음력 팔월 보름의 달빛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싶다. 그 아름다움과 겨울 동안 힘을 비축했다가 이른 봄부터 농사를 시작하여 결실을 거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미국인들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농가인구 비율은 4.5%이고, 농가인구수는 231만 4,982명이다. ‘통계표준용어’에 나와 있는 ‘농가인구수(Farm household population)’는 조사기준 시점 현재 농가로 정의된 개인 농가에서 취사나 취침 등,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수를 말한다.

 농경문화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고, 지금 우리는 함께 어울리고, 함께 하는 것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한 세상이 되었다. 1인 가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추석 명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당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교통수단 중 하나가 기차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철도가 놓인 것은 1899년 일본에 의해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다. 그 후 대륙 침략을 위한 속셈으로 우리국토의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잇는 철도가 놓였다. 철도는 자주부강의 상징인데 우리 손으로 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 근대사 비극의 시작이었다.

외세(外勢)에 의해 건설된 철도로 우리의 피와 땀을 빼앗겼다. 심지어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기차에 실려 끌려갔다. 두려움에 젖은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출발을 알리며 고막을 찌르는 아주 높은 고음의 기적소리와 쇳덩이가 맞닿으면서 내는 덜커덩 소리에 묻혀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철도가 우리의 것이 되었을 때, 우리의 국토는 분단되었다.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와 주권상실 그리고 해방과 분단.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아픔들 속에서도 우리는 맨 손으로 지금의 경제대국을 이룩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명절하면 TV에서 비춰진 서울역의 모습이 떠오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줄 뒤에 서 있으면서도, 손 손마다 꾸러미를 들고 있고, 고향에 간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기다리는 지루함보다는 즐거움과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다. 엄마나 아빠에게 안겨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 어떤 얼굴에서도 짜증이나 피곤은 찾아 볼 수 없다.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에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숨이 찬 흥분된 어조(語調)로, ‘고향 가니까 즐겁지요. 어머니!, 저희 내려가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빠 품에 안겨 있던 서너 살짜리 아이도 크게 외친다. ‘할머니 사랑해요!’라면서 얼굴에는 멋쩍음과 웃음기 가득하다.

그리고 내가 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 갈 때를 잊지 못한다. 동네를 통틀어 한 두 집 밖에 TV가 없던 시절, 잔잔한 물결처럼 일정하게 흔들리는 흑백의 화면에서 먹구름 같은 연기를 내 뿜으며 돌아가기 시작하는 기차의 쇠바퀴를 보았다. 그 후, 당진은 지나가지도 않는 기차를 타고 서울 가자고 아버지에게 졸라댔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나 셋이서 기차가 있는 신례원으로 갔다(오랜 세월 지나서야 신례원인줄 알았다). 지금 기억으로 날이 밝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꽤 걷기도 하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면서 기차역으로 갔던 것 같다.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타보았고 처음으로 가는 서울이었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을 판다는 것도 알았고, 흰 우유는 그 때 처음 맛보았는데, 왜 그리 비린내가 나는지 다 먹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읍(邑) 소재지에 있는 리(里)이면서도 시내버스가 당진에서 제일 늦게 들어온 곳이다. 지금도 동네가 갇혀 있는 형국(形局)이어서 버스가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되돌아 나가야 하는 특이한 곳이다. 그래서 걷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 시절에 기차를 탔다. 버스를 타 본 것도 손가락 꼽을 정도였는데, 서울로 가는 기차는 내 부푼 가슴과 나의 꿈을 싣고 ‘덜커덩, 덜커덩’ 큰 소리를 내며 서울을 향하여 달렸다.

올 해 귀성(歸省)길 기차 예매가 이미 끝났고, 명절 하루 이틀 전부터 기차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설레임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싣고 달릴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민족보다도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과 고난의 파고를 헤치고 꿈을 이루며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번 명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이용하여 고향으로 향할 것이다. 배가 불룩한 가방을 든 사람들, 멜빵으로 아기를 앞으로 멘 젊은 여인들, 이제 그들을 싣고 가는 기차는 더 이상, 애환과 슬픔의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꿈과 우리 모두의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