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산책 > 박 미 영 / 평론가, 수필가

 

한석봉과 그 어머니에 대한 일화는 누구나 알 것이다.
한석봉이 어린 시절에 서예 공부를 하던 중, 갑
자기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 때 어머니는 중도에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불을 끄고 글을 쓰게 하였다.

 

글씨를 쓰는 아들의 옆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었는데, 나중에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썰어 놓은 떡은 가지런했던 반면 한석봉이 쓴 글은 줄도 맞지 않고, 글씨도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불을 끄고도 가지런하게 떡을 썰었는데 한석봉은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한석봉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학업을 위해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요즘의 아들들이라면 분명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따졌을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떡장수 어머니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떡을 써는 것이 일상이었을 텐데 그 어려운 서예를 아들에게는 불 끄고 쓰라니 말이다.
더구나 10년 만에 찾아온 아들을 그 밤길로 다시 돌려보낸 매정했던 어머니.
덕분에 한석봉은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계속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했다지만 애석하게도 추사체는 있어도 한석봉체는 없다.

추사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을 몇 번이나 오가며 연경의 명필가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추사체가 생겨난 배경도 제주도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깊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가 탄생시킨 걸작이었다. 당시 선비들이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일 때 추사는 청나라의 선진 지식과 문물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데 정열을 쏟았고 ‘우리 것’을 창조해 다시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모두 자신의 뜻이었다.

만약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미가 보고 싶어 찾아온 아들과 대결하지 않고 아침밥이라도 먹여 돌려보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정희와는 서체와 다른 한석봉체가 추사체와 나란히 세계적으로 날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머니의 역할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하게 변해왔다. 모성의 본 바탕은 같지만 어머니로서의 전략은 계속해서 진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래서 프랑스 소설가 사강은 여성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길러내는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시대를 앞서 꿰뚫어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이 있는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일까?
자식에 대한 과잉기대와 과대평가, 맹목적인 사랑, 어머니의 계획적인 주도방식과 강제적인 복종은 어느 시대나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자식이 가고자 하는 길을 뒤에서 밀어주는 어머니, 자식이 하는 일을 믿고 포용해주는 어머니, 자식이 원하고 자식이 하고자 하는 일이 생기도록 끝없이 안내하고 다양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어머니, 그래서 자식이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머니.
알면서도 어려운 게 어머니의 역할인 것 같다. 두 아들을 보며 잠시 반성해본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