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상록수 故 ‘김 상 현’ 옹 ②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만나뵈었습니다.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을 걱정하시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시고 계셨죠. 그때까가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당진의 큰 별이 진 것에 대해 아쉬워하며 김제하씨는 눈시울을 붉힌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주는 인간 상록수 故 김상현 옹을 설성학교 당시부터 바로 옆에서 함께 해왔던 김제하(73)씨를 만났다.
‘김제하’씨는 설성학교 평교사로 시작해 1970년부터 폐교될때까지 교감으로 지내며 故 김상현 옹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숨은 선각자 중 한 명이다.
김제하 씨는 당시 故 김상현 옹에 대해 “이 땅의 젊은이들의 희망이셨던 큰 별”이라고 회상했다.
거지학교 그리고 1회 졸업식
그는 “그때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생은 120명정도 됐다. 배움에 굶주려 멀리 예산에서 찾아온 학생도 있었다”고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찾아온 학생들을 모두 따뜻하게 반겨주고 돌봐주셨습니다. 모두 자기 자식들처럼 아끼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 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셨죠”라고 말했다.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이 40%가 넘었다고 한다. 교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던 설성학교는 벽에 구멍을 뚫어 창문을 내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 사용했고 책상은 당진군 투표함 40여개를 가져다 썼다.
물론, 한겨울에는 난로도 없어 솔잎을 긁어다 불을 피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1965년도 2월 설성학교 제 1회 졸업식은 제 인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주위 학교에서 거지학교라 놀림을 받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졸업한 32명의 졸업생들은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학교를 떠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최고였던 농악대
1971년 1월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설성중학교 농악대는 전국에서 유명세를 탔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김제하 씨는 “김상현 선생님은 풍물을 유난히 좋아하셔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시 합덕읍에 사셨던 채규태 선생을 초빙해 농악대를 육성했어요. 그리고 그해 3월 기지시 줄다리기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그 후 1972년부터 충청남도 시군 대항 농악경연대회에 출전 연속 3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당시 다른 시군에서 당진 때문에 농악경연대회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김 씨는 “당시 농악대원들은 중노동보다 힘든 연습을 하면서도 간식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그들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해주었다”며 “그 시절이 모두에게 가장 행복했었던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일을 하셨고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으셨던 김상현 옹.
김제하 씨는 “선생님 같으신 분은 전 후 한세기 동안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훌륭하신 분이었다”며 그의 뜻을 널리 알리는 데 미약하게나마 본인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끝으로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 희망을 가지고 이를 헤쳐나갔습니다. 김상현 선생님의 바램처럼 이땅의 젊은이들이 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맡은 바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다.
그의 가족
항상 남을 위해 봉사해왔지만 정작 자신과 가족들에게는 사랑을 전하지 못했던 故 김상현 옹.
그는 슬하에 김낙유(60)씨 외 1남 4녀를 두었다.
김낙유 씨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