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 미 / 신성학원 원장



빠듯한 오전업무를 갈무리 짓고 한숨을 돌리다보니 점심을 먹으려면 시간이 좀 남아돌아서 참새방앗간 들르듯 아래층 세탁소에 내려갔다.
역시나 부지런한 참새들이 먼저 와 수다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자연스레 나도 아줌마의 힘을 발휘하여 한 무리를 이루는 찰라 전화 벨소리가 우리의 열띤 수다를 끊어놓았다.


“네-, 아-, 그래요, 한번 찾아보고 전화 드릴게요.??
세탁소 주인아주머니는 다소 난처한 목소리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세탁물 가장 뒤쪽을 이리저리 헤치며 뭔가를 열심히 찾다가 금세 밝은 표정으로 바꾸며 방금 전 통화했던 분에게 있다고 걱정 말라는 전화를 넣었다.


평소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말만 잘하던 아줌마 일행들은 여러모로 추측만 하지 입안에 자물쇠를 채운 양 입은 굳게 다문 채 의아한 표정의 질문을 던지자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한 삼년 전 어떤 할머니가 아주 지저분하고 입기에는 헐어보이는 투피스를 선불과 함께 맡긴 후 줄 곧 소식이 없어 잊고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 전 그 할머니의 며느리라는 분이 미국에 가셨던 시어머니가 어제 귀국하셔서 세탁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반신반의 하며 전화를 드렸는데 정말 있을 줄 몰랐다는 말과 함께 곧장 찾으러 온다고 했다 한다.


역시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상 좋고 후덕해 뵈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하며 세탁소 문을 닫았다.
“헐고 지저분한 옷을 뭐 하려고 찾아가지???


“아이고, 며느리가 저 나이면 할머니는 7-80대는 됐을 텐데 기억력도 좋으시네, 3년 전에 지불한 선불까지 기억하시니 말야.??
“젊은 우리는 여러 가지를 기억해야 되지만 늙어지면 기억할 것이 별로 없으니까 더 잘 기억하나 봐??” 등
방앗간 참새들은 기억력 좋은 할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부러움과 극성맞을 것 같은 느낌의 부정적 견해를 여과 없이 수다로 풀어내는 일에 혼신을 다하였다.


할머니의 또렷한 기억력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뱃속에서 보내는 정오의 신호가 세탁소 참새들의 날갯짓을 각자의 방앗간으로 향하게 하였다.
나는 다시 나의 일상에 빠져 할머니의 대단한 기억 용량에 대한 부러움을 멀리 접어두었는데 그 날 저녁 퇴근길에 하얀 모시적삼을 걸친 단아한 할머니 한분이 세탁소 조리개를 슬쩍 걷고 들어서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는 수박을 받아 달라 하고 세탁소 주인은 괜찮다 하고, 배달 온 청과물 주인은 무거운 수박을 들고 옆에서 낑낑대며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싸움구경과 불구경을 놓칠 리 없는 나는 손님인양 할머니 곁을 슬쩍 지나 세탁소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사건을 지켜보는 행운을 안았다.


3년 전 할머니는 결혼 60주년 기념으로 할아버지로부터 시집온 후 처음으로 동대문시장까지 동부인 나들이 가셔서 양장 한 벌을 선물 받았는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멀미가 너무 심해 새로 사 입은 양장이 온통 지저분해졌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한 마음에 물세탁을 했더니 옷은 모양새도 이지러지고 지저분한 오물은 제거가 되지 않아 버릴까 생각 중이었을 때 청천벽력과도 같이 할아버지가 집 앞에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온다간다 말도 없이 비명횡사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치기 싫은 할머니는 버리려고 대충 두었던 양장을 할아버지에 대한 정표로 다시 꺼내 세탁소에 맡겼는데 마침 미국에서 아버지 상을 치르려고 나왔던 딸이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가는 바람에 세탁물은 3년 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공간을 벗어나면 기억도 사그라질 줄 알고 딸을 따라 떠났던 할머니의 가슴과 머릿속은 온통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가득해 할머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더 또렷한 기억과 그리움을 안고 귀국하자마자 투피스부터 찾았던 것이다.
다행이도 마음씨 고운 세탁소 주인 덕에 당신의 그리운 추억을 찾아서 감사함을 수박 한뎅이로 표하니 제발 자신의 손이 부끄럽지 않도록 받아달라는 것이다.


연일 지속된 장마로 수박 맛이 지려서 장마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느라고 한동안 수박을 먹지 못해서 그런지 그날따라 할머니표 수박은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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