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충신 영의정 이양원과 이시경이 대호지면에 모셔진 유래
[당진신문 오피니언] 충신 영의정 이양원과 이시경이 대호지면에 모셔진 유래
  • 당진신문
  • 승인 2019.05.03 13:14
  • 호수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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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민속지리학박사, 문헌공이양원영의정기념사업회장)
이인화(민속지리학박사, 문헌공이양원영의정기념사업회장)
이인화(민속지리학박사, 문헌공이양원영의정기념사업회장)

대호지면 송전리 산61-23번지 일원에 임금이 내려준 사패지지(賜牌之地) 전답 99정보(2십7만평)에 영의정 이양원과 이시경을 모신 문헌묘, 이시경 사당, 묘역 등이 있다.(현재도 4만여 평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묘역이 대감산소로만 인식하다 지금은 충효를 갖춘 가장 훌륭한 분으로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말한다.

이양원은 조선조 석학으로 사림 당파가 극심한 시기 호당에 들어 3년간 사가독서하며 종계변무, 선조즉위, 한성유도대장, 해유령 대첩을 이끈 분으로 홍문관, 예문관 양관 대제학을 역임하며 문형(文衡)의 칭호를 받았고 당파에 휘말리지 않아 안으로는 효(孝), 밖으로는 충(忠)을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특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한성유도대장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 수도를 사수하는 책임을 맡아 불철주야 고심하며 해유령전투에서 육전(陸戰) 최초의 승리를 이끈 장수로 일인지하(一人之下)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다.

사당 문헌묘
사당 문헌묘

하지만 의주에 피난해 있던 임금이 중국(요동)으로 건너가셨다는 보고를 받고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불충(不忠)을 통감하며 8일간 식음을 끊어 선조 25년 7월 1일 피를 토하며 순국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이시경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전쟁 속에서 평소 정종대왕 4째 아들 선성군의 4대손인 이양원이 선성군사당(서산시 운산면 이문안)을 다니며 그의 장인 동래정씨 정창을 위해 잡아 놓은 신위지지에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시경이 밤낮으로 왜군들의 눈을 피해가며 임진강, 한강, 서해바다를 거쳐 대호지 출포리 원미마을 공선마당으로 들어와 송전리 고지내(谷地川)에 모셨다고 한다.

원미마을은 옛날 원님들이 말 타고 나타나던 곳으로 출포리 뱃터가 있었다. 열두모랭이를 거치는데 창말, 벌말이 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성연면 명천가는 큰 배(칠복호, 조은호, 녹두환)가 지났다.

묘역에는 이양원부부, 이시경 묘소와 말 무덤이 있다. 말 무덤은 이시경 묘소(61-18번지) 아래 두루뭉실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시경은 3년간 이곳에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시묘살이를 하였고 또 바로 어머니 정래정씨를 위해 4년간 하였다. 그 후 소촌찰방이 되어 5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적의 요충지인 진주 난강에서 적을 성공리에 물리치고 강을 건너는 중 숨어있던 왜놈의 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당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그의 마부가 말등에 있던 담배쌈지를 이용해 관장으로 묘소를 대신해 2019년 현재까지 429년간 이양원 묘소가 그대로 있고 아들 이시경 묘가 그 아래 있다.

이곳에 후손들이 사는데 그들을 고지내 이씨라고 부르며 명문대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 중에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선중,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이응백 박사 등이 있다.

이양원은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려 문형(文衡)임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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