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땅 끝에 서서 희망을 보았다.
 땅 끝에 서니 알을 깨고 막 나와 세상을 보듯 그렇게 바깥이 보이기 시작했다.
 땅 끝에 서서, 바깥을 향해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날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그것이 희망이란 걸 알았다.
 땅 끝에 섰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토말(土末) 또는 갈두리라고 하는 이곳은 북위 34°17´38˝에 위치한 한반도 최남단의 땅끝 마을이다.
 한반도의 땅 머리에 해당하는 최북단은 북위 43°0´39˝에 위치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이라 한다.
 이 두 지점이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을 이어주고 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땅 끝의 해남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극북의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이로부터 ‘3,000리 강산’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땅끝 마을 갈두리(또는 토말)에는 해발 156m의 갈두산이 있다.
 백두대간이 동쪽 해안선을 따라 등뼈를 형성하며 그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남서쪽으로 돌려 지리산까지 골격을 세우고, 사이사이의 모든 산맥들과 작은 줄기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빚어 내려와 여기 토말의 갈두산에서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갈두산의 주봉인 사자봉 정상에는 토말탑과 토말비가 세워져 있다. 1981년에 세워진 토말비에는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여 한겨레를 이루어 국토를 그은 다음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사자봉이라 우리조상들이 이름하여 땅끝 또는 토말이라 하였고 ---” 라고 새겨져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에는 흑일도, 백일도, 노화도 등의 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떠서 출렁이며 해상국립공원의 빼어난 경관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면 진도의 타는 노을이 보이고 맑은 날이면 제주도의 한라산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를 내려와 토말탑이 세워진 곳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갔다. 최남단의 땅 끝 중의 땅 끝이었다. 해안에 접한 육지의 끄트머리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남쪽으로 도도록하게 발가락을 좀 더 내민 부분에 탑이 세워져 있었다.
 내려다보니 수 십 길 낭떠러지 아래 바위에 모여 앉은 갈매기 떼 한가롭고, 파도가 밀어 내는 포말만 엉겼다가 스러지고 스러졌다가는 다시 엉기기를 반복할 뿐, 길손 하나쯤 등장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 했다.
 한반도의 끝, 그 땅 끝에 서서 시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길을 떠나면 언젠가는 끝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으려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끝이 벼랑 위라면 더 나가기 위해서는 날아올라야 한다.
 끝에 서서 뒤돌아보면 끌고 온 여정이 훤히 보인다. 중간에 오면서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감동의 파노라마로 선명하게 다가온다(감동 없는 파노라마는 없다).
 끝에 나서서 휘둘러보면, 속이 보이고 겉이 보이고 멀리 바깥도 보인다. 중간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든 것들이 일별(一瞥)만으로도 선명히 떠오른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지금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내고 있다. 상실의 시대 혼돈의 시대 불확실의 시대를 어렵사리 지나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생각을 바꾸고, 체질도 바꾸고, 옷도 바꿔 입고 그래서 도식화 되고 고정화 된 관념도 다 바꿔야 한다. 냉정한 시선으로 냉철한 판단력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세계화의 대열에 끼어들어가야 한다. 시작의 대열에 서둘러 나서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고, 갈 곳도 많다.
 끝이란 새로운 시작의 의미일 뿐이다. 시작은 끝을 향해 가지만, 항해의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인류 역사에 끝은 없다.
 인간사에도 끝은 없고, 인생에도 끝은 없다. 다만 토막의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이어져 가는 것일 뿐, 끝은 없는 것이다.
 나는 땅 끝 마을의 토말탑이 세워진 벼랑에 서서 바다 건너를 보고 있었다. 다도해의 그 다도(多島)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는 것은 멀리 제주도와 한라산도 아니었다.
 나는 그 너머의 일본 땅을, 그 더 너머의 태평양을 보고 있었다.
 그 더 너머의 새로운 시작, 희망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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