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인물들4 송익필

박 철 준 (朴哲濬) / (예) 공군대령

약 력
- 충남 당진군 송산면 출생
- 경남대 정치외교학(서울) 박사과정
- 합동참모본부 작전참모부 연합/합동작전담당
- 한미연합사 미사일방어처장
- 한미동맹기념관 추진위원



부친의 악업으로 불운한 송익필

송익필의 불운은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킨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비롯된다.


신사무옥이란 중종 16년(1521년) 신사년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사건을 일컫는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鈿)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송사련(宋祀連)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안처겸의 어머니 상(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해 안처겸, 안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를 하게된다.
송익필의 집안에는 먼 조상 중에 고려 원종 때 상장군을 지낸 이가 있지만, 가까이로 고조부, 증조부는 벼슬 없이 지냈고, 조부는 말단 관직을 겨우 지냈다.
그러다 부친 때에 와서 외형상 크게 가문이 일어난다. 부친 송사련(1496~1575)은 그의 어머니가 좌의정 안당 부친의 몸종 딸로써 비천한 출신이다.


그는 이런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고자 당대 권력자 심정 밑에서 관상감 판관을 지내면서 큰 벼슬로 출세하려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와 신분은 다르지만 이복(異腹) 외삼촌 뻘 되는 안당의 집안사람들과 지인(知人)들이 모인 곳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송사련은 안당, 안처겸 등이 ‘조광조 선생을 모함했던 심정, 남곤 등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선생의 불명예를 되찾자’는 모의를 계획하는 것을 듣게 된다.


송사련은 이를 심정에게 고발하고 이로 인해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년)’의 참변이 일어나, 사건에 관련된 안당과 그 집안사람들이 처형된다.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으로 출세하고 안당집안 재산을 차지하여 한평생 권세를 누리다가 1575년에 80세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부친의 이러한 영화로운 인생과는 달리, 무고 당했던 안당 집안의 신원(伸寃)이 1540년에 회복되면서 송구봉(7세)의 인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저 송씨 집안은 윗대 할머니가 안당 가문의 몸종이었고, 친족관계로 봐도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뻘도 되는데, 그 집안을 그렇게 도륙내다니…”하는 세간 사람들의 악평과 구설수뿐만 아니라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송익필 집안사람들은 시달림은 당했지만 권세가 남아있어 큰 탈은 없었다.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그러나 조선시대의 신분사회에서 천출(賤出)이라는 점은 송씨 형제들에게는 큰 장애가 되어 송익필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벼슬보다는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송익필은 50대 초반까지는 율곡, 성혼 등 절친한 친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간접적으로 자신의 경륜을 정치와 학문에 반영한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어 대학자, 교육자로서 비교적 무난한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나이 53세 되던 해(1586년, 선조9년)에 이미 죽은 부친의 관작(官爵)마저 삭탈당하는 불운을 당한다.
본래 국법에 의하면, ‘노비집안이라도 2대 이상 양역(노비 아닌 신분)을 했던 집안은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송구봉의 집안은 조부 송린과 부친 송사련이 2대에 걸쳐 관상감 벼슬을 지냈으므로 노비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은 원래 천한 출신인 송씨 집안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서인계인 정철과 원수지간이던 동인계의 이발, 백유양 등이 정철과 송구봉을 해치고자 한다.
‘송씨는 우리집 몸종이다’라는 소송건을 제기한 안당후손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4대를 걸쳐 내려온 송씨 집안의 양적(양인증명 문서)을 모두 없애버린다.


송씨 집안은 꼼짝없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전락되고, 죽은 송사련도 법적으로 노비가 되고 만다. 보복심에 불타는 안당 집안의 노비가 되면 온갖 핍박과 가해가 있을 것이라는 건 너무도 뻔했기에, 70여명의 송익필 일가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뿔뿔이 도망간다.


이사실을 안 안당 후손들은 송사련의 묘소까지 찾아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한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된 송익필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출세 길이 막히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송익필은 이를 원망하지 않고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며 순순히 받아들인다.


현실정치에 회의를 품고있던 구봉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나 옥사로, 무려 1,000여명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고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아무런 끈이 없었던 그에게 출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호남 출신들은 동인의 편에 섰지만, 그는 이이가 있는 서인의 편에 들어갔다.


그는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지만 이이가 죽고나자 스승을 비판하며 동인의 편에 섰다. 그의 성격은 상당히 꼬장꼬장했다고 한다.
임금인 선조 앞에서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았으며, 선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싫은 내색까지 했다.


따라서 그는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고을, 나아가 호남의 민심을 얻게 된다.
이이가 죽자 서인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 중에서도 송익필은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는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이 그를 비롯한 서인 모두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송익필 각본, 정철 연출의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정말 송익필의 각본에 정철이 연출을 맡아 날조된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해서 이것을 빌미로 동인 세력을 밀어내고자 했던 ‘사화'라는 시각도 있다. 또 단순히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학혁명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으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찍혀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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