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송악면 기지시리 긴 능선에서 발원하는 물이 오룡산 등에서 발원하는 물과 만나 북류하여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이 가학천은 비록 하천의 길이가 짧지만 과거 지진으로 형성된 하천이다.
이 하천은 우리나라 하천 수계와 방향이 다른 단층(斷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지질구조가 북북향으로 어느 시기 일정한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하천은 조선 후기 덕수이씨 집안에서 정곡리와 명산리 서원포 사이를 간척하였고 그 후 광복 후 195,60년대 염전이 많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 말 한보철강이 들어서면서 안섬, 월곡리, 송산면 가곡리 일대를 막아 농경지가 된 땅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거의 인구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농경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이 하류쪽에서 현대제철소 등 철강산업이 들어서면서 급속히 변화 발전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원래 지진과 간척, 그리고 당진 유일의 사립교육기관인 동악서원(이안눌을 모심)이 있었던 곳이다.

송산면 명산리 서원포에 조선의 문인 이안눌, 그리고 송산면 도문리 덕수이씨 선산에 이의무, 이행 등 조선 중후기 당대의 최고의 인물들을 간직한 곳으로 송악면 석포리 갯께, 송악면 가학리 당닥골(옛날 사리때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으로 풍어를 기원하던 당이 있던 곳) 등이 옛날 바다였음을 알리는 지명이다.


① 석포리 갯께 용화샘

송악면 석포리 갯께 버스정류장에 갯께 송방이라 불리는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있고 그 가게의 뒤쪽에서 조금 떨어진 덕수이씨 산소근처 논 가운데 「용화샘」 혹은 「용창」, 「용충」, 「용천(龍泉)」 등으로 불리던 물이 잘나던 못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그 형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옛 용화샘이 있던 자리에서는 지금도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용천은 용이 살던 샘이라 하여 용충, 용창, 용화샘 등으로 변음되어 불리는데, 옛날에 이곳에 용 3마리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3마리가 승천하는데 두 마리는 승천했고 나머지 한 마리가 오르려고 하였다.
이 용화샘물은 서해바다와 통해서 송산면 서원머리 노라리 목쟁이로 나오거나 고대면 당진포리 온동 방죽가에 있는 샘으로 연결되어 물이 쉴 새 없이 나온다고 한다.


몇 년 전 경지정리를 할 때 불도저 기사가 꿈을 꾸었는데 이틀간만 연기를 해 달라고 했는데 그냥 불도저로 밀자 커다란 이무기가 잘라져 나오고 불도저 기사는 그날 저녁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다 한다. 이 이무기가 남아있는 한 마리 용으로 이틀간 시간을 주면 용이 피신가려고 했다가 불도저가 밀어 붙여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② 가학리 오리문 다리

오리문 다리는 송악면 가학리에 있는 가학교의 옛 이름이다.
오리는 십리 반의 오리로 기지시의 긴 등에서 현재의 가학교까지의 거리가 2.5km 정도이니 기지시에서는 십리의 반인 오리라고 부른 것 같다. 서울 남동쪽에 있는 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조선조 태조 5년(1396)에 세워졌고 세종 때 개축된 조선조 때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체의 성외 반출이 허용되었던 문인데 허물어져 홍예만 남아 있었으나 1975년에 개축되었다. 수구문의 뜻은 광희문(光熙門) 또는 남소문(南小門)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성안의 물이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 수구에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곳 오리문의 뜻도 기지시 긴 등에서 발원하여 가학계곡으로 북류하는 물이 주변의 오룡산에서 흐르는 물 등과 합류하여 가학교에서 한진선인 지방도 630호를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 교차하여 서원들 송산간척지를 거쳐 아산만으로 유입되지만 서원들과 송산간척지가 바다였을 당시는 지금 가학교 근방의 가학천 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입구였을 것이다.


즉, 물이 흘러나가는 문의 역할을 하는 셈이었고 「오리경에 있는 수구문의 다리」 즉, 「오리문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나 1914년 가(佳)자와 금학(金鶴)의 학(鶴)자를 따서 가학리라고 불리면서 이름도 가학리에 있는 다리이니 가학교라 불리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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