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삼/ 월간조선 편집국장



<사신(史臣;사관을 말함)은 논한다. 민생의 희비애락(喜悲愛樂)은 수령에게 매인 것인데, 폐조(광해군) 때는 아래에서 주의(注擬;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하는 것과 위에서 제수하는 것이 모두 은화(銀貨)의 다소에 의해 결정됐다.

병수사나 수령 자리가 비었을 경우 외부에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은화 몇 냥을 아무개의 집에 바쳤으니 의당 아무 벼슬에 주의될 것이다. 은화 몇 냥을 아무 전(殿)에 바쳤으니 의당 아무 직임을 얻을 것이다” 했는데, 모두 들어맞았다.

또 인사가 있는 날은 대궐 뜰이 저자와 같이 난잡했고 염치없는 무리들은 스스로 벼슬 값을 정해 앞다퉈 돈을 바쳤다. 그리하여 병수사와 넉넉한 고을의 수령 값은 무려 2000~3000냥에 이르렀다.

경기 고을 중 피폐한 곳이라도 빈손으로 얻는 자가 없었다. 부임 후에는 쓴 돈을 충당하는 데 전력하여 백성들에게 자신이 뇌물로 썼던 은의 배를 수탈함으로써 민생은 황폐화되고 팔도는 황량해졌다. 당시 패망을 초래한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심을 많이 잃은 것은 필시 여기서 말미암은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능양군은 3월 13일 순찰 군사가 주워 온 어보를 가지고 서궁(경운궁)으로 가서 광해군이 구금시킨 인목대비(선조의 두 번째 부인)에게 옥새를 올린다. 신하들이 대비에게 왕위를 결정할 것을 청하자 대비는 “먼저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인목대비:“(광해군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참아온 지 오랜 터라 내가 그들의 목을 잘라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신하들:“예로부터 폐출된 임금은 감히 형륙(형벌에 의해 죽임)으로 의논하지 못했습니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주(하나라의 걸과 은나라의 주. 포악한 임금의 대표자)만한 이가 없었으나 이들도 죽이지 않고 추방했을 뿐입니다.”

이덕형:“폐군(廢君)에 대해서는 천륜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아들이 비록 효도하지 않더라도(인목대비는 광해군의 계모다) 어머니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교는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인목대비:“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 수 없다. 역괴(광해군)가 스스로 모자(母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이덕형:“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연산군)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했으니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인목대비:“경의 말이 실로 옳다. 그러나 역괴는 부왕(선조)을 시해하고 형(임해군)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다. 그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했다. 어찌 연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능양군:“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했습니다.”

인목대비:“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선조)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했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돌아가시게 했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

● 쿠데타 모의와 진행 과정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쿠데타의 배경과 능양군의 즉위 과정을 인조 1년 3월 13일의 실록을 근거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
능양군은 의병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여 ‘인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선조의 승하 후 인목대비의 교지에 의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 왕위에 오른 후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광해군 시절의 실력자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 소생인 정원군 이부의 맏아들)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 선조가 세자를 바꾸려는 의사를 가졌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 후 광해군은 선조가 늘그막에 얻은 인목대비(광해군에게는 계모가 된다)의 아들 영창대군을 시기하고 인목대비를 원수처럼 대했다.

이에 이이첨과 정인흥 등이 부추겨 임해군(광해군의 형)과 영창대군을 섬에 유배시켰다가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연흥 부원군) 집안을 멸족했다. 인조의 막내동생 능창군 이전도 역모사건에 연루됐다 하여 죽이자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이 화병으로 죽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을 뿐 아니라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삭제하여 평민으로 강등시킨 후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 과정에서 왕실과 외척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화가 미치자 인조와 인목대비의 집안 사람들이 광해군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사정이 이쯤 되었으니 화가 단단히 난 인목대비가 실각한 광해군의 살점을 씹으려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실록은 광해군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왕조의 신하들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모두 추방했고 어진 선비들은 죄에 걸리지 않으려 초야에 숨어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했다. 또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다(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재건과 왕권 강화를 위해 임진왜란 당시 불탔던 궁궐 수축에 많은 백성을 동원함으로써 원성을 샀다).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됐다. 이에 임금(인조)이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반정할 뜻을 두었다.>

이런 기록들은 광해군을 무력으로 실각시킨 후 정권을 잡은 세력이 실록(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실록이란 이름 대신 ‘광해군일기’라 불린다)을 편찬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깎아내리고 쿠데타를 합리화하려는 데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먼저 광해군 타도의 쿠데타를 모의한 인물은 무인(武人) 이서와 신경진, 구굉과 구인후였다. 이들은 모두 인조의 가까운 외척들로서 당파로 말하자면 서인(西人)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인(文人) 중에서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지로 포섭한 것이 김류이고 이들이 광해군 타도라는 목적에 의기투합한 것이 경신년(1620)이었다.
쿠데타군은 3월 12일 밤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귀, 김자점, 한교 등이 홍제원으로 나가보니 모인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변서가 궁궐에 들어갔다는 말이 돌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귀가 북병사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어 호령하자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마침 이 시점에 김류가 홍제원에 나타나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 지휘권이 다시 김류에게 넘어가자 이괄이 크게 노하여 빼들었던 칼을 거두고 돌아가려 하자 이귀가 나서서 간신히 화해시켰다.

● 쿠데타에 성공한 능양군, 왕위에
오르다

능양군(후에 인조)이 친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에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이쯤에서 군사는 장단의 군사 700여 명, 김류와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송영망, 신경유 등이 거느린 군사가 600~700 명으로 불어났다. 밤 3경에 쿠데타군은 창덕궁에 이르러 능양군이 인정전에 나아갔다.

궁중에서 숙직하던 자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왔는데 이덕형(도승지)과 윤지경(보덕) 두 사람은 능양군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로 보아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눈치챈 후에야 절을 올렸다.

능양군은 김자점과 이시방을 서궁(경운궁)으로 보내 인목대비에게 쿠데타 성공 소식을 전했다. 대비는 두 사람을 맞고는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직접 찾아왔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이에 두 사람이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알렸다.

곧이어 능양군이 도승지 이덕형과 이귀, 동부승지 민성징 등에게 의장을 갖추고 인목대비를 모셔오도록 했다. 이귀 등이 경운궁에 나가 누차 모셔갈 것을 청했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능양군이 경운궁으로 나갔다.

이때 주위에서 능양군에게 연(輦)에 오를 것을 청했으나 능양군은 거절하고 말을 탔다. 광해군을 떠메어 뒤에 따르도록 했는데, 도성 백성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오늘날 이런 모습을 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며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능양군이 경운궁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청문 밖에 들어가 절을 하고 통곡하자 시위하던 장사와 신하들이 모두 통곡했다. 능양군이 엎드려 죄를 빌자 인목대비가 말하기를 “능양군은 종가의 맏아들이니 대통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한다.

패배한 자에게는 죽음이, 성공한 자에게는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것이 쿠데타의 일반적인 순리다. 쿠데타에 성공한 후 그동안 서인 세력에 해를 주거나 서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던 신하들은 도륙을 당했다. 3월 13일 병조참판 박정길, 상궁 김씨와 승지 박홍도가 참수를 당했다.

<박정길을 베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병조참판 박정길이 제일 먼저 대궐에 와서 임금(인조)께 배알했는데 병조판서 권진이 들어와 아뢰기를 “박정길은 원흉(광해군)의 심복으로서 위태롭고 어수선한 이때 병부에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신도 이 역적과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속히 박정길을 베어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하고 두세 번 간청했다. 임금이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묻자 여러 장수들도 “박정길은 끝내 죽음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권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그를 끌어내 베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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