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환 전 당진시장

당진이란 오지고을 탄생
인류의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전 되었듯이, 이미 당진도 1,300여 년 전 당나라와의 국제교역이 이루어졌던 당진항(당시 한진)이 있기에 바다를 중심으로 당진문명의 발상지가 되어 오고 있다.
지정학 적으로 옛 충남 도청소재지인 대전으로부터 최 서 북단에 위치한 당진은 공직자들에게는 곧 좌천 지역으로 울면서 부임 하지만, 떠날 때 는 당진인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 울며 떠난다는 전설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한양은 해로(海路)를 이용하면 2,3일이 걸리고 육로를 이용하면 4,5일이 소요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60년대 버스 편으로 서울을 갈 때는 보통 스페어 타이어 펑크 때우면서 8,9시간이 소요 되어야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 했으니, 서해안의 작은 마을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가난퇴치를 기치로 뽕나무 식재가 범국가적 사업으로 시작 되었을 때, 당진은 야산 구릉지가 많아 누애 산업은 물론, 당진의 자랑인 삼베 짜기 생산으로 농촌 소득의 큰 효자 노릇을 하였다.

당진인의 정신과 인심은?
그렇다면 우리 당진사람들의 정신과 인심은 어떠한가?
일찍이 대 중국과의 교역이 이뤄지고 있어 서양문물들이 여과 없이 교류되고, 그로 인해 남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하는 심성이 강했으며, 또한 넓은 평야와 간척지, 구릉지 등으로 농·축 산업이 발달하여 비교적 넉넉하고 풍요로움이 있어 어려운 자들을 베풀고, 나눔의 기부정신과 함께 품앗이 농사일로 근면성과 협동심이 남달라 70년대 새마을 운동도 성공의 선구적 모범 도시이기도 하였다. 면천 읍성을 비롯하여 4.4독립만세운동, 3.10학생 만세운동, 소난지도와  승전목 등에는 의병 항쟁의 거사가 있었고 이외에도 유물유적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으며,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수적이면서 충효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당진 면천 복 씨의 시조인 복지겸 선생, 같은 시대 면천 박씨의 박술희 장군, 조선 중기 무신 남이흥 장군이 있고 그의 선친 남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추격하다가 적의 흉탄에 생을 마감한 위대한 분이시다. 조선 중기 송구봉 선생은 이율곡, 이퇴계 선생과 연을 맺었던 도학자이시며, 카톨릭 종교 문화 발원지인 당진은 한국 천주교의 최초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솔뫼 성지의 고장이다.
이밖에 당진에서 태어난 분들은 아니지만, 운양 김윤식 선생은 한말 정치와 문장가로 5년여 동안 면천면 양탑사찰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기록한 면양행견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으며, 면암 박지원 선생과 김종수 선생도 면천군수를 역임한 분들이시다. 그리고 기독교리 전파를 위해 석문면 삼화교회에서 진력했던 여자 독일계 쇄읍(鎖邑)선교사도 당진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당진의 가치를 세운 근대화의 시작
드디어 60년대부터 뽕나무 밭 이였던 당진이 상전벽해의 고장으로 바뀌는 역사가 진행 되었고, 1979년 신평 운정리와 아산 인주면을 잇는 3.4Km의 삽교천 방조제 준공이 (故)박정희 대통령의 최후 국토사업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1984년 8.4Km의 석문,대호방조제가 당진과 서산을 잇고, 1995년에는 국내에서는 단일 방조제로 가장 긴 10.6Km의 송산 석문 방조제(넓이 120m, 높이 13m)가 8년5개월 만에 기름진 옥토로 준공되는 민족의 대 역사가 시작됨으로 써, 당진은 자연재해가 적고, 해풍을 맞고 자란 전국 제일의 해나루 쌀 생산과, 해안포구 간척지 방조제를 함께하는 낚시터와 연인 드라이브코스 등, 수도권내로서의 관광 풍경이 화려하며 2만2천여ha 에 쌀 농경지(연간 114천톤, 전국1위)와 밭 7만7천ha가 수리 안전율 98%로 가뭄 없는 농사를 짓고 있으며 당진시 면적도 704㎢로 서울 605㎢ 보다 넓고, 싱가폴국가 693㎢ 보다 자치 영토 면적이 넓은 당진으로 서해안 권역에서 중심이 된 곳이다. 이 뿐만이겠는가? 국가 산업단지 3개소, 일반 산업단지 5개소, 농공단지 7개소 등 바다를 끼고 1천40만평에 한국 굴지의 대기업뿐만 아니라, 1천1백여 개 의 공장 생산 기지가 활발히 가동되고 있어 서해안에서 가장 입지가 좋은 당진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모든 길은 당진에서 통한다.
2000년 11월 5,820m의 서해대교와 서해고속도로가 개통 되면서 오지 마을 당진시는 항공, 육로, 해로 등의 교통이 제일 좋은 환황해권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발 빠르게 수도권 내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는 등 모든 길은 당진에서 출발된다. 수도권 규제 완화 정책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당진이 아닌 첨단 미래 도시로 부상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말해본다.
또 국제 무역항인 당진항을 중심으로 연간 6천5백만톤의 물류 이동으로 2조5천억 원의 경제 소득을 유발하고 있으며(2020년 1억만 톤 예상) 근로자 3만여 명, 수출규모 5000백만 톤, 항만규모 34개 선좌의 위용을 자랑하는 한국경제의 중심 터가 되고 있다.

또 다른 문화, 역사적 가치
우리 당진은 또 다른 역사,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다. 1998년 국내 3대 명승지 중의 하나인 왜목 해뜨는 마을의 재발견, 2004년 당진의 국제무역항 이름 찾기 성공,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2015년 기지시 줄다리기 유네스코 등재, 2017년 1천여 년 전 농산물 저수지인 ‘합덕제’가 세계 유산에 기록 된 것도, 당진시의 세계화를 위한 5대 발견으로 앞으로 계속 발전시킨다면 문화 역사적 명승지가 될 것이며 비수기가 없는 500만 관광객 유치도 가능할 것이다.
이제 당진은 산, 바다, 육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수도권 지역의 도시민들에게 농·축산물의 공급 기지가 되었고 기업 도시로, 대 중국 교역 전진기지로 한반도의 중심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또한 당진 전 지역은 해양 문화권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선사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과 부족국가로서의 유적지 등이 발굴 되는 등 중앙 박물관과 공주 박물관 수장고에 1만여 점(원형보존 유물3천여 점)이 잘 보관되어 있어, 2013년 시립 박물관 건립을 위해 1만여평 부지를 매입하였으나, 아직 제자리 걸음으로 멈춰 있는데 이것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되겠다. 당진은 잠재 되어 있는 자원들이 너무 많아 이를 잘 개발하고 보존하는 선진적 자세가 중요하다.
이제 2020년부터 서해안 산업관광 철도가 운행된다. 당진항과 중국 산동반도(위해시)와의 375㎞의 해저터널 개설도 한국과 중국이 머지않아 국책사업으로 추진 될 것이다. 바로 해상교통 관문의 시작점은 당진항이다. 2025년부터는 수도권 인구가 급격히 유입 될 것이다. 인구 30-50만 수용 도시개발, 군부대 이전, 동·서간의 균형발전, 지역경제를 유발 할 다양한 기업의 유치, 시민들을 위한 문화적 기반조성, 제2의 고향을 갖고 있는 이주 시민들에 대한 따뜻한 친구, 형제 되기 운동전개, 저 출산 타개로 성장 동력이 멈추지 않도록 개혁적 자세도 필요하다.
다행이 “당진사랑 모임회”가 발족 되었다는 소식이다. 더욱이 당진은 40여 만의 출향 인사들의 도움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인적 자산도 갖고 있어 우리 17만 당진 시민들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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