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의 회장직을 내려놓는 당진시낭송가협회 김명회 회장

시라는 것이 사실 노래와 같은 것이고
문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매력을
시낭송은 가지고 있어요. 시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과 같은 것이에요.

“제 다음으로 당진시낭송가협회를 이끌게 된 차현미 회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요. 미소가 절로 나온다고 해야 하나... 차 회장이 잘 해줄꺼라 믿어서 그런 것 같아요”

12년을 이끌어 온 당진시낭송가협회장직을 내려놓게 되는 김명회 회장의 표정은 평온하고 담담해 보였다. 12년의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아쉬울 법도 하련만, 김 회장의 표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정에 넘치고 밝은 표정 그대로다. 김회장은 논문심사, 김장 봉사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몸이 열이라도 견디기 어려울 일들을 기어코 해내는 김 회장의 목소리는 피곤할 법도 할 텐데 밝고 단아한 톤 그대로다.

불모지에서 시작한 시낭송
김 회장이 처음 시낭송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원들을 모집할 2006년도만 해도 당진에서 시낭송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시낭송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회원들 역시 주변 지인들이 많았죠. 하지만 시낭송의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여러 강연들을 통해 이제 회원들이 제법 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문화적 역량이 높지 않았던 시절부터 당진에서 ‘시낭송’이라는 분야를 이끌어온 김 회장의 활동을 돌이켜 보면 당진 어느 한 곳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다. 월례 시낭송회만 119회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심훈 전국 시낭송대회’ 4회, ‘청소년 시낭송대회’ 13회, ‘시낭송회의 밤’ 8회 등 다양한 시낭송 행사를 치렀다. 시낭송 교육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화원 수업, 당진읍, 당진1동, 송산면, 순성면 등의 주민자치센터 문화수업도 출강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학교 '학기 중 특강', '방학특강' 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김 회장의 지치지 않는 열정 덕에 시낭송의 아름다움을 어른들은 물론 학생들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시낭송 교육사도 12명이나 배출했다는 점도 성과다.

전국규모 시낭송대회... 시낭송 전파에 한 몫
김명회 회장은 지역 사회를 위한 헌신도 잊지 못할 부분이다. 상록문화제, 면천진달래, 소난지도 의병행사 등 거의 모든 행사에 다녔다. 현충일, 귀농귀촌 행사, 심지어는 이장회의자리까지 가서 시낭송 공연을 보여줬다. 지금은 차비조로 약간의 수고비가 지급이 되는 곳도 간혹 있지만 초창기에는 그런 것 없이 시낭송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당진 이곳저곳을 누볐다고 한다.

김 회장은 “시라는 것이 사실 노래와 같은 것이고 문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매력을 시낭송은 가지고 있어요. 시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과 같은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시낭송 공연을 위해 찾았던 곳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대호지의 작은 마을음악회자리였다고 한다. 공연 장소가 마을 창고였는데 처음 찾아가는 밤길이여서 말 그대로 ‘더듬더듬’하듯이 겨우 찾아갔다. 어렵게 찾아 간 공연장에는 마을 어르신 몇분만 앉아계셨다고 한다. 허탈할 법도 하건만 마음을 담아 정성껏 도화지에 옮기 듯 아름다운 시들로 공연장을 메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낭송을 처음 접하셨을 어르신들은 시낭송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여줬다고 한다. 김 회장은 아직도 당시 생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하고 흐뭇해진다고 한다.

김 회장은 “청중의 수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더라구요.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공연하느냐에 따라 10명의 청중이 모두 감동할 수가 있죠. 100명의 청중 중에 단 한사람도 감동할 수 없는 진심 없는 공연보다 훨씬 나은거죠”라고 말했다.

새로운 시도, ‘시극(詩劇)’
시낭송으로 멈출 수 없었던 김 회장은 보다 극적인 시낭송을 보여주기 위해 시극을 시도했다. 시극은 창의적인 도전이었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어요. 회원들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했죠. 자신감을 불어넣어가며 시극을 준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극을 준비하면서 고생스럽지만 오랫동안 기억할 일들도 많았다고 한다. 전문 무대 미술가가 없는 상황에서 갈대잎이 필요한 무대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정작 갈대를 구할 곳이 없어 직접 초락도와 석문방조제 인근으로 가서 낫을 들고 지게를 멘 채로 갈대를 베어왔다.

그렇게 마련된 갈대를 트럭에 실은 후 ‘문예의 전당’까지 이송해 무대를 꾸몄다. 무대는 아름답게 꾸며졌고, 시극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정작 시극을 마친 후 무대를 청소하는 것이 갈대를 베어 오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어렵사리 갈대를 구해 공연을 마쳤는데,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 어지럽혀진 무대를 보며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12년의 세월을 시낭송과 함께 한 김명회 회장. 그 사이 당진에는 전국규모의 시낭송대회가 열리게 됐고, 학생들을 위한 대회도 마련됐다. 한 사람의 열정이 시낭송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회장직을 마친 후에도 지도교수로 시낭송가협회를 돕기로 한 그녀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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