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요즘 세상이 참 그렇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고 부정의 뜻이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이 참 마뜩잖다"는 뜻이 된다.
언제인들 세상이 마뜩하다고 할 만큼 흡족해본 적이 있었으랴만 "요즈음 세상은 참 너무도 많이 그렇다".
요즘 우리는 참 많이 속이 상하고, 참 많이 슬프다. 세상이 참 너무도 많이 마뜩잖기 때문인데 이 마뜩잖은 것들은 우리를 속상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런데 마뜩잖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도 적잖게 섞여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빚어 만들어낸 그것들은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들이다. 볼 것, 느낄 것, 생각할 것, 해야 할 것 등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보지도, 느끼지도, 생각지도, 하지도 말아야 할 것 등을 하는 무신경, 무감각의 조화로 우리가 만들어 낸 걸작들. 우리가 빚어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잊혀지기 전에 꼭 챙겨서 슬퍼해주어야 할 것들.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들을 찾아본다.
맨 먼저 튀어 나오는 게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대의민주제의 그 대의를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능력이 넘치고도 넉넉히 남을 만큼 대단한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형편없는 인사들로 골라 뽑은 작금의 아둔하기 짝 없는 우리들의 안목이란 놈, 제 발등 제가 찧은 잘못을 슬퍼해야 한다.
정작 더욱 슬퍼해야 할 것은, 한 번 후회로 모자라서 다음번에 또 똑같은 아둔을 되풀이하고서는 찧은 발등을 다시 찧어대는 그 통절한 후회를 더욱 슬퍼해야 할 것이다.
조금도 더 가까이도 더 멀리도 할 수 없이 적정 간격을 유지해야만 하는 평행선, 이미 알고 있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끝을 향해 타협없이 달리기만 해야 하는 그 평행선의 운명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촛불집회 대화의 부재를 슬퍼해야 한다. 단초가 된 쇠고기 협상의 대안부재를, 민심의 속을 간파하지 못하는 행정의 난맥을 슬퍼해야 한다. 거듭된 사과를 위해숙인 대통령의 뒷머리를, 육탄으로 나서 막을 자 없는 정부의 인재빈곤을, 인왕산에서 촛불을 바라봤다는 그 고독을, 그러고도 끝내 국민의 가슴에 와 닿지 못하는 그 진정성을 우리는 매우 슬퍼해야 한다.
길거리에 나앉은 의원들, 의무도 직무도 책임도 국민적 여망도 희망도 망각한 채 일방통행만 고수하는 그 고민 없는 두꺼운 얼굴을 슬퍼해야 한다.
한 눈으로 보면 촛불이 보이고 두 눈으로 보면 영혼이 보인다는 어느 분인가의 편향된 시각일 뿐인 그 말씀을 슬퍼해야 한다. 한 눈으로 보면 촛불이 보이고 두 눈으로 보면 경제파탄이 보인다는 또 다른 어느 분의 또 다른 편향된 시각일 뿐인 그 말씀도 슬퍼해야 한다. 한 눈으로 보면 같은 촛불은 보이는데 두 눈으로 보면 왜 영혼도 경제파탄도 같이 보이지 않는가? 함께 보려고 하지 않는 편향된 시각, 따로 보아야만 하는 그 편향된 시각, 우리는 그것을 더욱 슬퍼해야 한다.
서로의 폭력이 먼저라는 시위대와 경찰의 강변을, 쇠파이프가 향하는 상대와 물대포가 향하는 상대가 다 같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군홧발에 밟혀 일그러진 여대생의 얼굴을, 시위 현장에서 유모차에 불편하게 앉아 잠든 아기를, 눈물 흘리는 전경어머니의 눈물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파업 현장에서 흘리는 근로자의 눈물을, 먼지를 쌓으며 줄줄이 서 있는 기계를, TV 화면의 그것들을 바라보며 내어 쉬는 서민의 한숨을 슬퍼해야 한다.
일을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용직 현장 근로자의 처진 어깨를, 노숙자의 소주병을, 아무런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없는 무대책을, 그 수치가 배가될지도 모를 불확실한 경제상황의 불안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노래방 도우미로라도 사교육비를 벌지 않을 수 없다는 모성을, 그 지독한 막무가내식의 교육열을, 모성을 노래방으로 내모는 외에 아무 해결책 없는 우리교육의 백년지대계를 슬퍼해야 한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의 실종을, 국민들의 그 열화 같았던 성원과 염원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그렇게 흘러가는 듯한 현실속의 상황들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라는, 듣기는 좋으나 사실은 있지도 않은 그 허수 속에 숨은 고상한 지성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흔적조차 없이 나는 몰라라 하고 있다가, 때가 오면 드디어 물 만난 고기가 되어, 듣도 보도 못한 태평양쯤에서의 전설 속 무용담쯤 가볍게 끌어들여 내 것으로 소화해내는 그 신출귀몰하는 솜씨를 보게 될까 우려하며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용기를 갖추지 못한 지성은 지성도 아니라고 일갈하며, 교훈으로 따끔하게 일러 가르쳐주는 엄한 아버지로서의 민중을 그리워하고만 있는 우리를 크게 슬퍼해야 한다. 먼저 나서지 않는 자신에 분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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