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례(당진수필문학학회 사무국장)

관악산 아래 로 나있는 굽어진 산길에 우리가 타고 있는 차가 미끄러져서 지나가고 있었다. 차창밖에는 봄의 빛깔이 무르익어서 아카시아 나무에는 어느새 하얀 꽃망울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나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제발 이 계절에는 이별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이별하기에는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가, 내 의식의 저 너머 어딘가에서 이별을 직감하고 있었던 듯싶다. 종내에는 이 길을 혼자서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하던 불안은 현실이 되어서 돌아왔다. 모두들 울었지만 나는 울어지지 않았다. 입속만 바싹 타들어 갈 뿐 모든 생각이 정지되어 버렸다. 시간이나 감각, 현실까지도 온통 마비되어서 나를 마치 남처럼 바라보고 어느 땐가는 히죽 웃기까지 했다. 그런 나를 시종 내내 따라다니면서 언니는 울어라. 제발 싫컷 울고 보내줘라 왜 울지도 못하냐고 했지만 한없이 기어 들어가는 눈자위만 쓱쓱 문질렀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내가 사는 집은 절해 고도였다. 조금 있으면 그 사람이 올 것만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큰 키에 준수한 그 모습이 느린 걸음으로 대문을 들어 설 것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작은 바람소리에도 일어나서 마당을 가로질러서 대문을 열고 두리번거리고 휘청거렸다. 들어와서는 또 뛰어나가고를 거듭하느라고 온밤을 새우곤 했다. 찔레꽃 향기가 몸서리치게 번져오는 밤에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비로소 그 사람의 부재가 느껴졌다.     온몸의 살갗이 다 벗겨진 듯이 그 져 닿는 곳마다 아프고 쓰렸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 까지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목소리가 터졌다. ‘하나님 나를 죽게 해 주세요’, 최대한 높게 그리고 멀리 들리도록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님 들리시거든 제발 나를 죽게 해 주세요’. 일상은 날마다 곤두박질을 치고 그럴 때 마다 술이 취해서 쓰러지고 일어나면 다시 또 술을 마시곤 했다.

바람소리는 그 사람의 한숨이고 발자국소리였다. 다하지 못한 말들을 전해주려 하는 몸짓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라 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 사람이 있는 거기만 가고 싶다고 염원하고 빌었다. 새벽이 돼 가도록 마당가를 서성이거나 이미 고목이 된  커다란 감나무 밑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울었다. 얼마나 정신 상태가 극기에 치받쳐야 미칠 수 있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내 몸에는 그런 장치가 없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나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그 사람과 나를 묶어주었던 그 어떤 것이라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 처음 그 사람과 마주쳐다 봤을 때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땅의 진동을 느끼고는 어린 마음에 이것은 운명이라고 당돌하게 귀결 지어 버렸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둘이서 훌쩍 떠났던 여행길에서 함께 와르르 웃음을 쏟아내던 바닷가도, 바람소리도 내 기억 속에서 다 살아있다. 응급실에서 겨우 정신이 든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울먹이는 내손을 잡고 나를 두고 아무데도 안가겠다고 했었다. 그 말을 믿었다. 어리석게도 언제까지 라도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갈등과 다툼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 사람은 큰 산을 바탕으로 하여 굵고 높은 나무그림을 그려 놓고 그것을 지향했고, 소심한 성격인 나는 작아도 예쁜 확실한 그림을 그리자고 고집했다. 그 사람의 존재를 받쳐주는 지지대가 되어주었더라면, 맘껏 하늘을 향해서 커나가라고 힘을 보태 줬다면 나를 떠나지 않았을까. 인생은 혼돈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내 생각만 고집한다면 틀린 방향으로 갈수 있다고 그때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나서 살았던 날들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많은 날 동안을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한 가지도 잘한 것이 없는 듯이 여겨진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고 그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속상해 하거나 투정부리지 말걸 그랬다. 어느 것 한 가지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리운 만치 회한도 크다.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오두방망이질을 치다가도 또 어느 때는 한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을 치기도  했다. 마음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널뛰기를 해대고 있는 동안 무수한 세월이 흘러간 것 같다. 잠시 잠깐 험한 꿈에서 깨어난 듯도 싶은데 계절은 어느새 다섯 번이 바뀌었다.

혼자서는 한 번도 갈 수 없었던 그 사람이 있는 그곳을 혼자서 찾아갔다. 황량한 산속에서 마냥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그곳에는 겨울바람에 쓸려온 낙엽들이 고스라니 덮여 있었다. 너무 늦게 왔다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없는 그 사람을 가슴에 안았다. 바람소리조차 없는 적막한 그곳에는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줄 모르고 살았던 어리석은 나의 울음소리만 고요한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당신 없는 세상 여전히 외롭겠지만 이제는 일어서서 걸어 볼게요. 당신이 내 남편인 것이 항상 자랑스러웠어요. 그러니 만나는 그날까지 당신 아내인 채로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살아  볼게요. 아직도 여전히 당신은 내 사랑입니다. 잘 가요. 내 소중한 사람. 나는 이제야 그 사람을 보내주려 하고 있다. 돌아서서 내려오는 산길에는 그 사람의 손길인양 산 그림자가 길게 앞장을 섰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