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전우회 당진시지회 오운근 회장 인터뷰

1967년 부산 3부두에서 베트남행 배에 몸 실어
“풀더미위에서 자고  일어나보면  나무가 누렇게 변해 있어”
“자고 있는 중에 고엽제 뿌리고 간 건지 알 수 없어”
당진 고엽제 전우회 소속 240명… 피해자 인정받기도 힘들어

195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당동에 있는 잡화 도매상에 취직해 배달 일을 시작했다는 오운근 지회장이 면접을 볼 때 사장님에게 던진 제안은 “월급은 안 받아도 좋으니 숙식해결과 운동을 하게 해 달라”였다고 한다.

15살 당돌한 꼬마의 제안은 받아 들여졌고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됐다.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배달을 하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을지로 3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에서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22살이 되던 해인 1965년 입대를 하게 된다. 유도 3단의 유단자로 입대한 오운근 지회장은 바로 하사관에 지원했고, 부산 3부두에서 베트남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때가 67년도 11월 28일이었다.

오 지회장은 “제대를 4달 앞 둔 시점에 배에 오른 건 약혼을 한 몸이었기 때문이었어. 결혼하려고 보니 가진 게 너무 없는 거야. 그래서 돈을 좀 모아 보겠다는 심산이었지”라고 회상했다.

오지회장은 백만 29연대 1중대 1분대장의 신분이었고, 같은 배에 ROTC 출신의 3소대 소대장이 있었다. 나이가 동갑인데다가 천안출신이어서 같은 동향이라고 생각했던지 3소대장은 편하게 반말로 하라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그렇게 첫 번째 전장인 ‘투이호아’라는 곳에 배치를 받게 된다. 그 곳에서 근무를 하다가 유명한 북베트남의 ‘구정공세’를 맞닥뜨린다.

떨어지는 포격 속에 오운근 지회장은 386고지라고 부르던 골짜기에서 포격이 시작되는 걸 직접 확인하고 M60으로 응사했다. 오운근 회장의 응사를 시작으로 아군은 반격을 시작했고, 280발의 고사포로 북베트남군을 몰아 낼 수 있었다. 당시 아군이 받은 포격은 48발. 전투 후에 천안 출신의 3소대장이 전사한 것을 확인했다.

전우의 죽음을 처음 접한 오운근 지회장은 “사람몰골이 아니었지. 파랗게 부은 얼굴에 가슴 아래는 형체를 확인 할 수도 없었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게 지금도 그 감정을 다 표현하기가 힘들어”라고 말했다.
2년의 파병생활동안 숱하게 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무뎌지기를 바란 전우들의 죽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를 지금도 괴롭히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고엽제 피해 전우들이 고통 속에 있는 걸 보는 것이다. 본인도 고엽제 피해 등급을 받은 참전용사이기도 하지만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와 겪는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운근 지회장은 “정글 한 가운데 기관총을 가져다 놓고 진지를 구축해서 대기하지. 날이 어두워지고 징글징글하던 풀더미 위에서 잠을 청하잖아.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그 풀들이나 나무가 다 누렇게 변해서 푹 꺼져 있는거야. 우리가 가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자고 있는 중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독한 고엽제를 뿌리고 간거야”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머나먼 타국에서 총탄을 피해 한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지 10년도 되지 않아 결국 건강하던 오 지회장은 쓰러졌다. 하지만 그 때는 왜 그랬는지도 몰랐다. 예순이 넘어서 다시 쓰러지고 나서야 고엽제 때문인걸 알았다.

오 지회장은 “당진에 고엽제 전우회 소속이 240명 정도 돼. 하지만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받기도 힘들어. 참전유공자 수당도 형편없는 수준이지. 그 형편 없는 수당마저도 지자체마다 다르니 고쳐져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오 지회장에 따르면 인근 서산의 경우는 20만원의 참전수당을 지급하지만 당진이나 태안 같은 경우에는 15만원 정도를 지원한다고 한다. 미망인에게 지급하는 돈 역시 차등이 있다. 지자체 사정에 맞게 지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엽제전우회 당진지회는 2014년도 우수지회상을 받았다. 오운근 지회장은 그만큼 투명한 활동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고 한다. 앞으로도 고엽제 피해자들을 위한 활동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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