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태조왕건의 의형제 박술희

박 철 준 (朴哲濬) / (예) 공군대령

약 력
- 경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 합동참모본부 작전참모부 연합/합동작전담당
- 한미연합사 미사일방어처장
- 한미동맹기념관 추진위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그러나 고려를 개국한 영웅으로 한순간 역사의 조명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반역자의 칼에 쓰러진 박술희는 후세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다. 특히 반역자의 쿠데타가 일부라도 성공한 경우에는 반대파 일가족은 대부분 몰살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진의 면천박씨 시조인 박술희의 후손은 남한에는 5천명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나라의 공무역을 담당하였던 대진(大津)은 당진(唐津)이었다. 당진을 중심으로 가장 큰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던 박술희(朴述熙) 장군에 대해 1.2.3.4부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박술희와 복지겸 그리고 당진에 대해서 알아보고, 2부에서는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의형제인 박술희에 대해서 기술하고, 3부에서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도 후손들로부터 가장 홀대받고 있는 박술희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제4부에서는 박술희 장군 기념관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강력한 사병집단을 운용한 박술희

이러한 점은 혜성군이 대중국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짐작 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한다. 그리고 박술희가 혜성군 출신이라는 것은 그가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집안의 호족 출신임도 말해 주고 있다. 박술희의 아버지인 박득의(朴得宜)는 관제가 대승(大丞)인 것으로 보아 상당한 경제적ㆍ군사적 기반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물임을 알수 있다.

태조 13년(930년)에는 후백제와의 대치관계를 고려하여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고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도독부사 (都督府使)로 임명하였던 것을 고려할 때, 대승(大丞)의 품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박득의는 혜성(면천) 지방의 호족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호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사병을 양성하였으며, 병력을 중심으로 서로 세를 규합하였다.
당시 복지겸과 박술희가 왕건, 궁예 등과 접촉이 가능하였던 것은 스스로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박술희가 왕규와 대립할 때 100여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는 혜성군에서 그의 아버지가 거느리던 사병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병을 기르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데, 박술희 가문은 혜성에서 사병을 기를 만큼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려초 가장 장수다운 박술희

고려왕조실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박술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삼국유사, 박씨원류 사본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조 왕건의 유언을 받들어 끝까지 혜종을 보필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박술희(朴述熙)는 혜성군(지금의 충남 당진군 면천) 출신이었다.


박술희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용감했다. 먹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식성도 좋았다. 심지어는 두꺼비나 개미도 먹어치웠다. 박술희는 나이 18살에 궁예의 호위무사로 입신할 만큼 무예가 출중하였다.
고려 개국 1등 공신이었던 복지겸의 고향이기도 한 면천은 당시 해상무역의 요지로서 개성이나 나주 같은 지역과 동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씨 등과도 자연스럽게 친밀해질 수 있었다.
당시 가장 젊은 나이에 무예가 출중하고 인물 됨됨이가 비범한 박술희는 비슷한 또래의 왕건, 신숭겸 등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의형제를 맺는다.


이후에도 후삼국 통일과 고려개국을 위한 모든 정사와 전투현장에 왕건과 함께하는 등 신숭겸, 박술희는 왕건의 가장 신뢰하는 장수이며, 친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박술희는 왕건의 의형제로서 왕건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전쟁터에 나가면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또한 왕건의 첫째 아들이었던 무(武)를 철저히 후원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태자 무(武)와 박술희와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백제의 견훤이 40여년 동안 애를 써서 후백제를 이루었으나 맏아들 신검이 견훤의 왕위를 빼앗자, 견훤은 고려태조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견훤은 왕건에게 고하기를 “늙은 이몸이 폐하께 몸을 의지해온 까닭은 역적 자식을 처단할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날랜 군사를 빌려주어 반란을 일으킨 적들을 섬멸해 주신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태조 왕건은 태자 무(武)와 박술희 장군에게 보병,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한다.
이와 같이 박술희는 당시 왕건의 친동생과 같이 가장 총애하는 장군이었음을 알수 있다.


고려 2대왕 혜종을 후원한 박술희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고 태자를 책봉하는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의 생모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집안이 ‘측미(側微)’하여 반대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측미하다는 말은 신분적으로 미천하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권력이나 군사력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자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주면서 가장 신뢰하는 박술희 장군에게 보여주도록 하였다.
자황포는 태자가 입는 옷감이다. 오씨는 왕의 명대로 이를 박술희에게 보여주었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무를 태자로 책봉 할 것을 청했다.


이는 그만큼 박술희에 대한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얘기다. 태조는 재위 26년(943) 4월 죽음을 대비해 써두었던 훈요 10조를 그에게 넘겨주었고, 임종할 때에는 그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그대의 힘에 의해 태자가 책봉되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태자를 잘 보필하여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오”


그러나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태조의 다른 아들들이 왕위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에게는 29명에 달하는 왕비가 있었고 거기서 25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모두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나 친척, 특히 왕규가 그러했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장인이다. 혜종의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씨가 바로 왕규의 딸이었다. 그러나 왕규는 이미 태조에게 두 딸을 바친 바 있다.


따라서 혜종에게는 장인일 뿐 아니라 외할아버지 뻘이 되기도 했다. 왕규의 딸과 태조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광주원군(廣州院君)이라 했다.
왕규는 원래 함규(咸規)였다.


그는 최고 관부였던 광평성의 차관급인 시랑이었다. 후에는 태조공신이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도 태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태조의 임종 때 염상· 박수문 등과 더불어 유조(遺詔)를 받을 정도였다. 태조는 생시에도 우세한 정치적 지위에 있던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側微)’함을 보강시켜주었다.


훈요십조와 박술희

박술희는 태조 왕건의 신임이 가장 두터웠다. 태조는 재위 26년(943) 4월 죽음을 대비해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주며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대순(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위를 받았고, 한(漢) 나라 고제(高帝)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 나라 제업(帝業)을 일으켰다.

나 또한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잘못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고, 외람되이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니 이 몸은 이제 늙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후사(後嗣)들이 기분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요를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니 아침 저녁으로 펴 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임종할 때에는 그에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맡기고 후사를 부탁했다.


“그대의 힘에 의해 태자가 책봉되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태자를 잘 보필하여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오”


일부 학설에서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대필한 사람이 박술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할 것.
(2) 도선의 풍수 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 것.
(3) 왕위는 맏아들이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어질지 못하면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해주고, 그 아들도 어질지 못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 줄 것.
(4)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 제도는 따르지 말 것.
(5) 서경을 중시할 것 : 서경에서 100일 이상 있을 것을 명시.
(6)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7)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상벌이 올바르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
(8) 차령 산맥 이남과 공주 강 밖의 사람들은 쓰지 말 것.
(9)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10) 왕은 근심이 없을 때에는 경계하고 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할 것.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된 것이다. 당시 성행하던 불교, 토속신앙, 풍수지리, 도참사상 따위가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태조가 실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정책면에 적응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훈요십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신민에게 공개될 유훈은 아니었다.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왕규의 반역과 혜종의 죽음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신명순성태후 유씨의 아들인 요(堯 : 뒤의 정종)와 소(昭 : 뒤의 광종)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혜종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왕규는 혜종 2년(945) 이런 움직임을 왕에게 알렸다. 이때 사천공봉의 직위에 있던 최지몽도 국가에 반드시 반적이 있을 것이라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혜종은 오히려 딸을 소와 결혼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혜종이 그의 딸을 소와 결혼시키자 잘못하면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사위인 혜종을 제거하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밤에 왕의 침실에 자객을 보냈다. 자객은 혜종이 깊이 잠든 줄 알고 칼을 내리치려 하는데 혜종의 주먹이 먼저 얼굴을 강타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혜종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자객을 끌어내게 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묻지 않았다.


또 하루는 혜종이 몸이 불편하여 신덕전에 있었다. 그런데 최지몽이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는 일찍부터 천기를 볼 줄 알았다. “폐하! 제가 천기를 보니 오늘밤에 큰 변고가 있을 조짐이옵니다. 그러하니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십시오” 혜종은 그의 말대로 몰래 중광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왕규는 야밤에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벽을 뚫었다. 혜종의 침실로 들어가니 침대는 이미 비어 있었다. 왕규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최지몽의 계략인 줄 눈치챘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그였기에 이를 안 것은 최지몽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지몽을 불러놓고 칼을 빼어 위협했다.
“임금의 침석을 옮긴 것이 너의 모사이지? 너를 죽여 없앨 것이다” 그러나 최지몽은 눈을 감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왕규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혜종의 측근이었고 신망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규는 조용히 물러갔고 혜종은 공연한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역시 벌하지 않았다.
왕규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좋든 싫든 자신에게는 장인어른이었다. 이러한 왕규의 혜종 제거 시도는 2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같은 혜종의 지지세력이었던 박술희와의 결별을 초래했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박술희 조차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항상 병사 100여 명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다.


둘째는 혜종의 성격 변화로 나타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질고 도량이 넓었던 혜종이 의심하고 꺼려하는 바가 많게 되었고 감정의 통제도 불가능해졌다. 아무 때나 화를 내고 어떤 때는 혼자 껄껄 웃기도 했다. 아첨하는 소인들만 가까이 하고 상벌도 공평성을 잃었다. 그러자 혜종이 즉위할 때 기뻐했던 많은 사람이 이제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혜종은 병이 들었다. 혜종은 자신의 제1비 진천 임씨에게서 낳은 흥화랑군(興化郞君)을 후사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우들 중에서 후사를 고를까도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처형의 아들이며 장인의 외손이기도 한 광주원군을 후사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이복동생인 요를 제치고 그를 후사로 정하는 것도 비합리적이었다.


끝까지 신의를 지키다가 희생된 박술희

요(정종)는 이 틈을 타서 긴밀하게 움직였다. 그가 왕좌를 차지위해서는 당시 최고의 관직에서 군국대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대광 박술희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박술희가 모반을 위해 100명의 무사를 항상데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반역을 음모했다고 모함하여 그를 갑곶으로 유배시킨 뒤 살해하였다.


이때 왕규도 박술희의 제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박술희는 왕규와 요에게는 공동의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요는 박술희를 제거한 뒤 서경의 왕식렴 군대를 끌여들여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왕규를 제거했다.


박술희와 왕규는 처음에는 한 배를 탔던 인물이었다. 태조 왕건의 큰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혜종(무)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혜종이 정치적 결단을 확고히 하지 못하자 분열했다.
박술희는 우직하게 태조의 유언을 지키려 했다. 끝까지 혜종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왕규는 재빨리 이해득실을 따졌고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사위였던 혜종을 제거하고자 했다.


태조의 또 다른 아들인 요·소의 세력을 이용하여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날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린 꼴이었다. 권모술수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이어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順陵)이다.

이에 대해 고려사 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己酉(기유) : 기유일에
王規殺大匡朴述熙)(왕규살대광박술희) : 왕규가 대광 박술희(朴述熙)를 죽였다.
述熙)性勇敢(술희성용감) : 술희는 성품이 용감하여
年十八(년십팔) : 나이 18세에
爲弓裔衛士(위궁예위사) : 궁예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後事太祖(후사태조) : 후에 태조를 섬겨
累樹軍功(루수군공) :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受遺命輔惠宗(수유명보혜종) : 유명(遺命)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及惠宗寢疾(급혜종침질) : 혜종이 병환이 나자,
遂與王規相惡(수여왕규상오) : 드디어 왕규와 서로 미워해서
以兵百餘自隨(이병백여자수) :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다녔는데,
王疑有異志(왕의유이지) : 왕이 그가 딴마음을 품었는가 의심하여
流甲串(류갑관) : 갑곶(경기 江華)으로 귀양보냈더니,
規因矯命殺之(규인교명살지) : 왕규가 이어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後諡嚴毅(후시엄의) : 후에 엄의(嚴毅)란 시호를 내리고,
贈太師(증태사) : 태사(太師)를 증직하였다.
配享惠宗廟庭(배향혜종묘정) :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박술희는 혜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향이란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던 일이므로 임금이 죽으면 종묘에 신주를 모신 후 생전에 그 임금에게 특히 충성하였거나 국가에 큰 공적을 세우고 죽은 신하에 대한 보답으로 종묘에다 그 신주를 모시게 하였는데, 이는 그 가문(家門)의 큰 명예였다. 또한 국가에서도 배향공신의 자손이 죄를 저질렀을 때 죄를 감하여 주기도 하는 등 그 자손들에게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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