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합덕방죽의 기원에 대하여
❷ 합덕방죽의 옛 모습에 대하여
❸ 합덕에 현덕왕후 권씨 생가지가 있다
❹ 합덕 주민과 아라비아인들이 교역했다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합덕방죽은 여러 문헌, 비문, 전설 등에 연호, 연제, 연지, 하호, 합덕지, 합덕제, 합덕제언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합덕방죽 축조 시기는 전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이며 전 부여박물관장 홍사준에 따르면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 또는 제30대 무왕시대(600~641)로 추정하고 있고, 홍병철은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의 전투 기간인 서기 918~935년경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먼저 합덕이란 지명은 《고려사》 권 106, 열전 권제 19 제신 추적조에 합덕부곡으로 처음 기록되고 있고,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홍주목조에 합덕현은 본래 덕풍현에 붙여서 부곡을 삼았다고 하여 1298년(충렬왕 24) 이전부터 합덕부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곡은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천민 집단 부락이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이를 특수 지방 행정 단위로 조직화해 목축·농경·수공업 따위에 종사하게 했으며, 양민들과는 섞여 한 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합덕부곡은 양인들 집단이 아닌 천민집단으로 통일신라 때부터 양민들과 섞이지 못하게 집단으로 감시하던 행정편제였다. 통일신라시대 때 감시해 관리하는 천민집단은 신라에 저항하던 백제유민일 것이다.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했거나 반대하던 세력으로 예당평야 광활한 농경지에서 일할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기에 합덕부곡은 통일신라에 저항하던 백제유민들의 집단거주지였을 것이고, 자연스런 현상으로 합덕방죽을 쌓기 위해 합심적덕(合心積德)했던 과정속에서 합덕이란 지명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 한화정책과도 궤를 같이하여 합덕이란 한자 지명이 고착화되었을 것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면천군 고적조에도 “온월부곡이 군 동쪽 23리에 있다. 가리저부곡도 군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면천에서 동쪽으로 8.28km지점에 온월부곡이 있고, 9km지점에 가리저부곡이 있어 합덕부곡처럼 합덕제 전후좌우 지역인 운산리, 성동리, 합덕리, 대합덕리 지역의 드넓은 농경지에 신라에 저항했던 백제유민들이 집단적으로 수용돼 통일신라시대부터 수도작농업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홍사준이 지적했듯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 산천조 “벽골지가 군 동쪽에 있다”는 기록의 벽골지가 현재 면천면 성상리 향교 앞 저수지가 아니라 합덕방죽이라는 점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선 충남서북부지역의 백제유민들의 저수지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백제유민들의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일본서기》권 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원년(662) 겨울 음 12월 1일 백제 부흥군의 피성(면천, 당시 추군의 몽산성을 지칭) 도읍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이 벽골지가 합덕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권 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원년(662) 겨울 12월 병술삭(1일)에 백제왕 풍장과 그의 신하 죄평복신 등이 사위노무라지(협정련), 치노타쿠츠(박시전래진)과 의논해 “이 주류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짓고 누에 칠 땅이 아니라 방어하기 좋아 싸울 장소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으로 옮기자. 피성은 서북쪽에 고련단경이 흐르고 남동쪽으로는 심니거언이 막고 있어 방어하기에 좋다. 또한 사방에 논이 있어 도랑이 파여 있고 비가 잘 내린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이 삼한 중에 기름진 곳이다. 옷과 의식의 근원이 천지에 감춰진 땅인데 비록 낮은 땅에 있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현재의 합덕방죽 전경. 합덕방죽 안에 조성된 공원, 석우천과 뒤로 예당평야로, 그리고 좌측으로 합덕제 제방이 보인다. ⓒ이인화 박사
현재의 합덕방죽 전경. 합덕방죽 안에 조성된 공원, 석우천과 뒤로 예당평야로, 그리고 좌측으로 합덕제 제방이 보인다. ⓒ이인화 박사

이때 치노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뜻밖의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류가 험준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했다. 

끝내 백제왕은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했다. 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김수 등을 보내 조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덕안의 오기)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이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다시 주류로 돌아갔다. 타쿠츠(전래진)가 생각한 바와 같다.

피성은 662년 12월부터 663년 2월까지 백제부흥군의 지휘부 치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피성은 북서쪽은 큰 산이 둘러쳐 있고 남동쪽으로 삽교천과 농경지가 자리 잡고 있어 외적을 방어하기 용이하고 넓은 들이 있어 곡물을 얻기도 편리한 곳이다. 또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고 큰 제방이 있던 곳은 합덕제 밖에 없어 660년대 합덕제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는 백제 2대 왕인 다루왕 6년(AD 33)에 시작됐고, 합덕제는 백제 6대 왕인 구수왕 9년(222) 봄 2월에 시축돼 8대 왕인 고이왕 9년(242) 2월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했다. 따라서 합덕제의 시축기는 홍병철의 후백제 견훤설보다는 홍사준의 6세기 중후반 위덕왕 시기로 추정하는 설이 더 가능성이 높고 더 나아가 구수왕 9년 222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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