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석 / 충남유도 고단자 회장

▲ 호서고등학교 체육대회 유도매스게임(1978년)
1. 근대 스포츠의 성장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 그와 더불어 스포츠도 존재하였다.
고대에서 중세로 역사 속에는 많은 스포츠의 유영이 남아있다.


신앙과 스포츠를 제전경기의 형태로 결부시킨 고대그리스인은 스포츠를 주제로 하여 훌륭한 조각과 회화를 창작하였다. 거기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생생한 현대를 발견하고 놀라는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궁정에서 승원에서 귀족의 장원에서 스포츠는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면서 성장해왔다.

2. 근대 스포츠의 싹틈
산업혁명후의 영국에서는 스포츠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계급사회가 성립된 영국의 신사들은 여러 가지 스포츠를 고안했다. 근대 스포츠의 발상인 것이다.

한편 미국의 시민사회에서는 대학과 기업과 교회가 암암리에 협력하여 영국의 스포츠를 개조하면서 대중화 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의 스포츠는 군대와 상선에 의하여 미국의 스포츠는 선교사의 손에 의하여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3. 우리나라의 체육
1896년 영국인 허치슨에 의하여 근대 스포츠가 도입된 이래, 그동안 체육계가 걸어온 길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형극의 역사였다.


1920년 광복의 꿈을 품고 겨레의 체력강화를 위하여 조직된 체육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당하고 수난의 역정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겨레의 이름을 빛낸 선구자의 뒤를 이어 꾸준히 정진한 결과 1960년대에 들면서 건전한 국민체위의 향상을 위한 ‘체력은 곧 국력’이라는 말이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스포츠가 갖는 의의나 기능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포츠 부문에 대한 투자증대, 스포츠인구의 증가, 국제스포츠 사회에의 적극적인 진출 등 괄목할 발전이 이룩되긴 했으나 세계의 스포츠가 날로 향상 발전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민체력의 향상은 더욱 시급한 문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체육인들이 꼭 성취해야할 근본적인 문제는 첫째로 스포츠의 올바른 이해를 통한 스포츠맨십의 확립이고 둘째는 과학적인 체력관리와 이론의 개발 실천을 통한 경기력 향상 셋째로 국제 경기를 통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스포츠외교의 자세확립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기위한 기초교육의 개발과 시설보강, 장기적 투자확대 등 현안의 문제가 허다하게 있지만 차츰 개선되어 나가리라 믿는다.

■ 각 종목별 역사와 당진의 스포츠

1. 유도의 역사
유도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발생과정이 다른 격기와 같이 생존의 본능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비교적 타당성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는가 그것 역시 확실치 않아서 단언 할 수는 없으나 사학자인 안자산씨가 저술한 무사영웅전에 의하면 우리나라 유술은 고려 15대 숙종왕때 일종의 정재(呈才)로서 음악과 함께 병진하였으며 그 후 충해왕때부터 점차 유행을 보아

그 호칭을 수박(手搏)혹은 권법(拳法)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인종왕때 무사의 세력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당시 정중부 등은 유흥의 하나로 삼는 동시에 군인의 상예로 행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곧 우리나라의 유술의 초기적 양상이라 할것이며 근대 유도는 일본의 가노오지고로가 1882년에 완성하였다.

당진의 유도

1976년 당시 호서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한 김영석 씨가 중심이 되어 서만영, 김길환, 정도영, 박노정 씨와 당진군유도회 발기인이 되어 창립발기위원장에 김영석 씨, 초대회장에 고 윤조희씨를 선출하고 제1회 당진군유도대회를 개최 한 것이 호서기 충남유도대회의 효시가 되었다.


1981년 고 임태순씨가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제7, 8회 호서지구 유도대회로 확대하였으며 1986년 5대 강금산씨가 취임하여 호서유도연합회와 충남유도회가 공동 주최하고 당진군유도회가 주관하는 제10회 호서기 충남유도대회를 창설하게 되어 제7대 서만영씨, 1997년 제11대 김영석, 1999년 제12대 이재춘씨, 2007년 16대 이임영씨가 취임하여 제32회 호서기충남유도대회를 2008년 11월 15일에 신성대학 태촌아카데미홀에서 개최한바 있다.


학교체육으로는 탑동초등학교(코치 이건휘)에서 정과로 행하고 있으며 용인대 호서체육관(관장 김기춘) 당진유도관(관장 권동호)에서 유도 수련을 하고 있고 신성대 생활체육과(교수 유영창)에서 유도를 수련하고 있으며 2008년 5월 19일 당진유도사랑회가 김영석 회장을 중심으로 76명이 당진유도 발전과 유도인구의 저변확대를 목적으로 창립되었으며 또한 당진유도유단자회가 2008년 12월 결성되어 인장환 회장을 중심으로 한 출향인유도인과 당진군내 유도인 들이 참여하고 있다.


2009년 당진원당중학교(교장 남궁환) 유도부가 창단될 경우 적극 지원할 계획과 당진유도사랑회에서 2009년 사업으로 당진유도종합선수권대회 창설을 계획하고 있다.

2. 태권도
어느 민족이든 그 원시 사회에 있어서는 투기가 유일한 체육활동이었다.
이러한 투쟁행위는 오직 생존을 위한 식물의 획득과 외적을 방어하는 인간의 본능적 활동이었다. 인간이 보다 효율적인 투쟁을 행하여 승리하기 위해서 무기를 발명하기 이전까지는 순전히 육체적 능력으로만 적과 대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힘만으로는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우세할 수 없다는 경험에서 무기를 만들어내는 지혜가 생겼다. 이무기의 발생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분수령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인간이 무기를 사용하게 되어서도 자기 체력을 튼튼하게 육성하려는 생존의식은 여전히 왕성하였다. 이러한 본능적 성향은 유희활동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와 마한의 무천 신라의 가배 같은 행사는 우리 선조들의 종교의식으로서의 스포츠적인 유희활동에서 태권도도 병행하였다.
태권도의 유래를 더 살펴보자.
고려 무신란을 촉발시킨 것은 수박희(手搏戱)였다.


고려사의 의종 24년(1170) 8월조에 따르면 의종은 보현원으로 가는 도중에 장병(將兵)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시켰다.
5명의 군사가 한조가 되어 겨루는 권법경기다.


이때 대장군 이소응이 패배하자 문신 한뇌(韓?)가 뺨을 치는데 격분한 무신들이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다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면서 무신란이 발생한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국왕이 수박희를 시켜서 이긴 자에게 상을 주었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할 만큼 고려국왕들은 수박희 마니아였다. 천민출신으로서 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의민도 수박실력 때문에 의종에 의해 발탁되었는데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무신정권 타도로 봉기했을 때 이를 진압한 주인공이기도 하니 의종은 화근을 키운 셈이다.


수박은 언제 유행했을까?
문헌기록으로는 ‘일본서기’황극원년(641)조에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의 수행원들과 왜의 건아들이 서로 수박을 겨루었다는 기사가 가장 빠르다.


고구려 무용총벽화의 현실과 주실 천장에 겨루기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도 수박희 일종이니 늦춰 잡아도 삼국시대 때부터는 유행했다.
조선에서 수박은 무과시험의 한 종류였다. 태종은 재위 11년(1411) 말 타고 활쏘기, 걸으면서 활쏘기, 달리기와 수박희를 시험해 갑사를 선발했는데 3명을 이겨야 했으니 8강권부터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경제육권에 임금의 호위무사인 보갑사 선발규정이 실려 있는데 4명을 이겨야 상등으로 평가받았으니 16강전부터 치렀던 것이다. 조선2대 국왕이었던 정종의 탄생일 같은 때면 정종, 태종, 세종세왕이 한자리에 모여 수박희를 관람하고 승자에게 벼슬을 높여 주고 부상을 주었다.

현재의 태권도는 과거의 수박희가 발전한 것이니 우리가 태권도 종주국인 것은 역사적 유래가 깊다. 당진에는 당진태권도협회(회장 최기택)가 있고 용인대호서체육관(관장 김기춘)을 비롯한 16개의 태권도 체육관이 있다.

3. 검도
역사가 오래고 문화의 근본이 깊은 우리겨레가 칼을 무기로 사용한 것은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였는데 인지가 차차 발달함에 따라서 이를 사용하는 방법이 생겨 오늘에 이르러서 검술이 있게 되고 창술과 궁술이 있게 된 것이다.


칼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돕는 것이 그 사명이다. 그 명칭에 있어서 한자로는 도(刀)와 검(劍)으로 구별하는데 날이 한쪽으로 난 것을 도(刀)라 하고 두 쪽으로 난 것을 검(劍)이라 함이 원칙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혼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1952 대한검도회를 창립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경찰, 교도관을 비롯해 각급 학생층에 널리 보급되고 있다.
당진에는 당진군검도회(회장 손창원)가 있다.

4. 씨름
원시사회에서는 맹수나 타 종족과의 싸움에 이겨야 생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그에 따른 기량을 갖고 있어야 했는데 씨름 역시 그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존재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씨름의 시초는 인류의 발생과 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생존을 위해서 인류는 자신이 지닌 총력을 다해 싸웠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갈일이다.
다른 동물보다 지적능력에서 우월한 인류이기 때문에 무기를 발명해서 동물계를 정복해온 것은 사실이나 무기가 발명되기 전의 인간은 자신의 체력으로 싸워서 이를 이겨냈을 것이다.


예컨대 때리고 넘어뜨리고 달아나고 차고 던지고 하던 것이 진보하여 칼이라든가 활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인류문명의 발전과 함께 스포츠화 하여 낚아채고 넘어뜨리는 것은 씨름과 레슬링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진의 씨름인으로는 전 대한씨름협회 심판위원장 한창준(현 당진군의회의원)이 있고 당진씨름회(회장 홍현수)가 있다.

5. 복싱
아담과 이브의 아이들이 복싱의 시조라고 하는 신화가 있다.
형이었던 카인이 달리기와 레슬링에 각별히 재주가 있었던 동생 아벨을 주먹으로 강타해서 때려눕혔다는 전설이다.


말하자면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복싱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이다. 미국 복싱사의 연구가인 존V그롭백에 의하면 BC 1만 년 전에서 8,000년경에 이미 복싱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에티오피아에서 이집트로 건너갔으며 이어 크레타 섬을 경유 그리스로 옮겨가 고대 올림픽의 꽃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와 같이 복싱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 고대 올림피아의 체전에서 거행되었다는 것은 BC 336년의 항아리나 꽃병 혹은 단지에 그려져있는 그림을 봐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당진에는 당진복싱회(회장 손순원)가 있다.

6. 용무도(龍武道)
용인대가 50여 년간의 무도교육을 기반으로 유도, 태권도, 합기도 등 무도, 스포츠교육을 재정립하여 우리의 것을 특성화 시키고 이를 세계에 보급 하고자 1998년 한국적 종합무도체계인 용무도를 개발해 공식화 했다.
당진용무도회(회장 최윤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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