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6.25 전쟁으로 인해 온 시가지는 불바다와 폐허로 변하였고, 주위에는 온통 시체와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냄새들과 전쟁으로 인한 포화의 화약 냄새로 가득하였고, 그 전장엔 전혀 희망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전쟁터가 바로, 전쟁터의 사실이며 슬픈 현실이다.>

1950625일 발발하여 31개월간 계속된 한국의 전쟁.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25전쟁의 배경

좌익은 물론 중도세력과 우익세력 일부의 반대 아래 성립된 이승만정권은 초기부터 여러 가지 불안 요인을 안고 있었다.

첫째, 미군정이 유지시켰던 친일세력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비호함으로써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로서의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사실은 그 두드러진 예다.

둘째, 군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저항이 고양되고 있었다. 해방 후 드높아진 민중운동은 5·10총선을 앞두고 선거반대투쟁, 2·7구국투쟁 등으로 한층 치열해졌으며, 여수·순천사건 때는 지리산 일대가 반란군 세력하에 들어갔고, 대구에서도 제6연대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대화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다.

셋째, 이승만 정권은 극심한 정치·경제적 불안을 맞고 있었다. 1949년의 경우 정부세출 60%가 적자세출이었고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2배로 뛰었으며, 공업생산은 44년의 18.6%에 불과했다. 505·30선거 결과, 이승만 지지세력은 총 210석 중 30여 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승만은 취약한 지지기반과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를 유도하는 한편,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장,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호언했다. 실제로 전쟁발발 1년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간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하는가 하면,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되면 모든 원조를 제공한다고 약속하는 등 한반도정책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이같은 이승만정권의 불안정성과는 달리 북한은 통치체제를 안정시키고 남한해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전쟁 과정 4단계

19506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대체로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재건,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했다.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되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에는 소련이 중국문제로 불참중이었으므로, 거부권 행사 없이 미국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미지상군은 이미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있었다.

2단계는 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50. 9. 15), 서울을 탈환하고(9. 28),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했으며(10. 13),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10. 26)한 시기다. 전쟁의 고비는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문제에 있었다. 이승만은 북진을 주장했고, 미국 역시 북진이 유리하다고 판단, 38도선을 넘었다.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유엔은 총회에서 38도선 이북 진격을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설치했다.

3단계는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10. 25)으로 전세가 역전,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51. 3. 24) 철원·금화 일대까지 진출하고(6. 11), 소련이 휴전을 제의(6. 23), 휴전교섭에 들어간 시기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 중국 남부지방에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맥아더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4. 11).

4단계는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이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즉각 받아들여 15일 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이 개최되고(7. 8), 이어 본회의가 열렸다(7. 10).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휴전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회담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경제원조·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고, 537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휴전협정에 의거, 한반도 장래문제를 논의하는 정치회의가 426일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특히 폭격으로 인한 북한지역의 피해는 극심하여, 미군지휘관이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적대감이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 체제가 더욱 굳어졌으며 남한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법적 권위를 지니고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을 격화시키는 고비가 되었고, ·일 안전보장체제를 재촉, 일본의 재군비강화와 전쟁경기를 통한 고도성장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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