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장 발언대
남대우 대호지면 도이1리 이장

[당진신문=이석준 기자] 도이1리 마을은 지금은 벼농사를 주로 짓는 농촌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한 어촌마을이었다. 

일제 시기 신동저수지를 축조하며 마을 깊은 곳까지 들어오던 바닷물이 막히게 됐는데, 이전까지 마을 앞에 복숭아나무가 많은 섬이 있어 도이리 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75년 25세의 나이에 직장생활을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어촌이던 도이1리 마을을 기억한다는 남대우 이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육로보다는 주로 배를 이용해 인천까지 왕래했었다고 회상했다.

남대우 이장은 “도이1리는 1989년 대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농어촌마을이었다”며 “마을 앞바다에는 꽃게, 실치 등 어족자원이 풍부했고, 쌀이 귀해 보리밥을 먹던 시절에도 워낙 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풍부해 반찬 걱정은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또한 “과거에는 인천을 오가는 배가 드나들고, 여관도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뱃말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며 “당시에는 이곳이 전기도 전화도 안 들어오던 시절이라 학교, 직장을 다니러 인천으로 많이 나가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인천에 당진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말했다.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을 가리키는 남대우 이장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을 가리키는 남대우 이장

도이1리 마을은 400년 넘은 의령 남씨의 집성촌으로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 중 60%이상이 의령 남씨였고, 지금도 주민의 약 40%는 의령 남씨이다. 마을에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크게 활약해 충절의 상징으로 불리는 남이흥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있다. 

남대우 이장은 “과거에는 주민 대부분이 남씨였으나 방조제 완공 이후 마을이 농촌으로 변하며 외지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나 지금은 다들 다 같은 마을주민이다”며 “또한 근래에는 귀촌인도 늘어나는 추세인데 나도 외지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어 귀촌인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늘 주민 간 화합에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마을 중심에 위한 충장사에는 1667년에 세워진 귀중한 문화재이고, 지금도 남이흥 장군의 위패가 보존돼있다”며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열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는 등 마을과 충장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도이리 마을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남대우 이장
도이리 마을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남대우 이장

남대우 이장은 이장 취임 후 어르신들이 자주 왕래하는 보건지소 앞에 버스 정류장 설치를 지속적으로 건의했고, 얼마 전 버스 정류장이 설치됐다. 이제는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보건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 다만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마을 안 도로가 파손 된 곳이 많다는 점은 아직도 걱정거리다.

남대우 이장은 “원래 보건지소와 버스정류장이 멀리 떨어져 있고, 인도도 없어 어르신들의 안전이 늘 걱정이었는데 이 문제는 얼마전 해결됐다”며 “하지만 마을 안 도로가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어 파손된 곳이 많은데, 야간에 주민들이 넘어지지는 않을까 늘 걱정이다.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조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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