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편] 용서가 피운 꽃 
[수필 한 편] 용서가 피운 꽃 
  • 당진신문
  • 승인 2021.09.11 01:27
  • 호수 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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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 시인,수필가

덩치 큰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꼬맹이를 쥐어박는다. 아이는 엇박자 화음인양 할머니 소리보다 더 크게 운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을 막으며 아이를 끌어 앉는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다. 건강한 아이 치고 자라면서 사고 한 번 안칠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통로 주변이 시끄럽다. 아파트 경비를 보시는 할아버지와 아내인 듯싶은 할머니가 양쪽에 있고, 그 사이에 열 살 남짓 꼬맹이가 앉아서 운다. 저녁을 약속한 식당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세 사람이 통로를 막고 있다. 

막무가내로 비키라할 수 없어 아이가 왜 우는 지를 물었다. 손자가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이 통로에 사는 주민의 자동차를 박았다는 것이다. 주인을 만나서 사과하려고 기다리는 중인데 물어 줄 돈 한 푼 없는 것이 걱정이란다. 돈 없음을 강조하는 할머니의 화가 가라앉아야 비켜줄 것 같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테니 전화번호를 적어 두고 들어가시면 좋을 듯싶다고 말씀 드렸다. 방금 전까지 흥분의 도가니탕을 끓이던 할머니가 ‘그럴까요’라는 말을 던지며 냉큼  일어선다. 

화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쏘고 주울 수 없다는 속담이 이렇게 맞아 떨어질까. 그들 사이를 뚫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 신경 쓰느라 보지 못한 내 자동차. 출고한지 보름 밖에 안 된 내 애마 운전석 문짝이 초토화 되었다. 아마도 자전거와  아이의 몸이 자동차에 직접 부딪힌 모양이다. 그 정도면 꼬맹이도 다쳤을 텐데 그 때는 아이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신발 한쪽이 벗겨진 채로 할머니가 다가오신다. 자동차를 바라보는 나에게 혹시 차 주인이냐는 물음을 속사포처럼 던지며 아이의 등짝을 또 때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와 똑같은 풍경이다. 애써 다른 점을 찾자면 할아버지는 뒤에서 구경하고 그만 때리라는 할아버지 역할을 내가 하고 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해할거라고 좀 전에 내 뱉은 내 말을 책임지기 위해 꼬맹이 가족을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어쩌면 내 말에 대한 책임보다는 반백년 전 큰오빠한테 회초리 맞던 어릴 적 나를 용서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여름 장마 중이었던가. 고무신발과 신작로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던 시절. 장난감이 자연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그 때.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고 지나가면 약속하지 않아도 친구들이 우리 집 앞으로 모여든다. 신작로에서 흙 썰매를 타거나 도랑물에 떠밀려가는 미꾸라지를 잡기 위함이다. 

두 살 터울 위인 다섯째오빠와 그 친구들이 먼저 신작로에서 놀면 나와 내 친구들은 자연히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다. 아무리 신나는 놀이라도 반복하다보면 싫증나는 법. 놀거리 뭐 또 있을까 궁리하는 중에 오빠 친구들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다. 신작로에서 옆 동네로 넘어가는 동산 오솔길이 질척거려 이웃마을에 가려면 돌아가는 불편함이 있다고 자갈을 깔아주자는 것이다. 

마침 십 육년 터울 큰오빠가 반장으로 일보던 때라 나의 선행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나와 내 친구들이 고무신발 가득 자갈을 주워서 오솔길 중간에 부려 놓으면 오빠 친구들이 알아서 나머지를 처리했다. 놀며 쉬며 대략 서너 시간 동안 도로공사가 아닌 오솔길 정비를 했다.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놀이를 찾던 중 오솔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있는 큰 무덤과 작은 무덤에서 잡기놀이를 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오르내려서 봉문이 다 벗겨지는 바람에 산지기가 자주 나타나 눈치 보는 놀이다. 

마침 장마철이라 오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오빠의 말을 믿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때 옆 동네 사는 깐돌이 오빠가 오솔길을 넘어 우리 집 앞을 지나 마을 안동네로 들어갔다. 얌전히 그냥 넘어갔더라면 해피앤딩이었을 것을 재미있게 노는 우리들에게 돌멩이를 여러 차례 던지고 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집에서 삽을 가져와 오솔길 중간에 구덩이를 팠다. 바가지를 가져와 흙물을 담아서 구덩이에 반쯤 채웠다. 마지막으로 구덩이 조금 지나서 옆 마을 방향에 자란 떼의 줄기를 조금씩 잡아 흔적 없이 사이사이 묶어 놓고 큰 무덤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는 깐돌이는 나타나지 않고 동네 어르신만 지나다녔다. 부축하고 돌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별 수 없이 또 흙과 자갈로 구덩이를 채우고 나뭇가지를 주워서 칡넝쿨로 엮어 뚜껑을 만들었다. 

그래도 미심쩍어 그 위에 또 자갈을 까는 수고를 마치자 저녁 밥 짓는 연기가 산자락을 덮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와 씻고 꿀맛 같은 저녁을 먹고 쉬려는 참에 닫아 둔 대문이 거칠게 열렸다. 

앞집 할머니가 절룩이며 이집 막내아들이랑 딸내미 좀 보자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랑 큰오빠가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막내오빠와 난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였다. 큰오빠가 갑자기 회초리를 들고 달려오더니 막내오빠의 등짝을 아무렇게나 후려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지릴 공포여서 숨 너머 가는 소리로 우는 바람에 오빠의 회초리로부터 무사했다. 하지만 허리를 꺾어 사과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은 회초리보다 더한 가시로 남았다. 우리가 묶어 놓은 떼를 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할머니가 걸려 넘어지면서 이가 부러지고 무릎이 다쳤다는 것이다. 할머니께 찾아가 눈물 찔찔 짜며 용서를 구하자 자랄 때는 다 사고 치며 크는 거라며 흔들리는 등을 다독여 주셨다. 

그 뒤에도 길에서 마주치면 친손녀 대하듯 반갑게 인사를 받으시고, 집으로 데려가 찐 감자나 옥수수를 호호불어 들려주셨다. 이다음에 크면 꼭 은혜를 갚겠다는 나의 약속을 잊으셨는지 용서라는 가르침을 주신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를 벗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내 애마는 십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사고 없이 무탈하게 잘 살고 있다. 아마도 꼬맹이가 긁는 바람에 액운이 다 달아났는가 보다. 

콩 심으면 콩 나듯 할머니가 심으신 용서라는 씨앗이 싹터서 또 다른 용서가 자란 것이 아닐까. 앞집 할머니의 부드러운 미소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