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오곡리 梧香 '송 규 섭'

송구봉과 이이는 같은 파주에 기거하였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할때는 시간이 없으면 서로가 편지로 주고 받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의 연락은 심의겸의 조카인 심경이 맡고 있었다.(율곡전서 상권 11 참조)

이 율곡은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가면서도 송구봉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삼가 문안 드립니다. 모두가 부모님 모시고 별고 없으신지 우러러 마음이 쓰입니다. 이(珥;이이 자신을 말함)는 가는 길에 별고 없이 오늘 강을 건넜으니 멀리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서로 헤어져 있는 수개월 동안에 반드시 새로이 얻는 것이 있으실테니, 이(珥)로 하여금 돌아와 만나서 괄목할 만한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珥)는 바쁘게 지내는 중에 배움의 힘이 또한 쇠퇴할 것이니, 한탄이 됩니다.(율곡전서 하, 권2 송운장부문 참조)

이이가 선조원년에 압록강을 막 건넌 뒤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이다.

30대의 송익필이 지닌 학식은 생혼과 이이의 학문적논변(論辯)을 통해서 드러난다. 성혼과 이이는 이기설을 비롯한 경전의 해석 등에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면 주로 성혼의 경우에 송익필에게 두사람 중에서 누구의 견해가 옳은지 중간적 입장에서 판정해 달라고 부탁하였다.(이종호지음)

성혼은 그의 나이 26세때 이미 그보다 한 살 위의 송익필에게 중절·부중절(中絶·不中絶)에 관해서 물을만큼 송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우계집 속집권3 송운장 187면, 한국문집총간 43, 1990 참조)

송익필이 36세일 때도 성혼은 철학적 문제를 담은 지선(至善)과 중(中)에 관해서 이이와 견해가 다른데 매번 만나서 고명하신 견해를 듣고 싶은데 사정이 그렇지도 못하여 이이와 합의해서 문의를 드린다는 말과 함께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우계집 188면 참조)

예조판서를 지낸 정철과도 예절에 관해서 수차례의 서신으로 질문을 받는다(분집권 6, 예문답 계함(정철)운 참조)

송구봉의 제자들로는 김장생, 김집, 강찬, 서성, 송이창, 정엽, 김유, 김반, 허우, 정홍명, 심종직, 유순익 등이 있으며 혹은 문학으로 혹은 벼슬로 모두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구봉의 시를 작품수가 많은 시형부터 소개하면 오언율시 139수, 칠언절구 123수, 칠언율시 108수, 오언절구 39수, 오언고시 28수, 칠언고시 8수, 오언배율 8수, 칠언배율 3수, 사언고시 1수의 순서인데, 그 중 율시가 247수로 가장 많다.

구봉은 도학자로서 정관(靜觀)하는 가운데 사물의 이치를 터득해 가는 즐거움과 사리(事理)가 통투(通透)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시로 지어 학문과 시세계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고요히 앉아서」 「고요한 가운데」 「하늘 족부족(足不足)」 「보름달(망월)」 「외숙을 전송하며」 「새로우거한 이웃 사람에게 주는데 두보의 시운을 써서짓다」 「운곡을 애도하는 글」 「운암에서 벗의 시에 차운 하다」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자연현상을 보고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응축시켜 놓은 것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선생의 저서로는 태극문 1권, 예문답 1권, 우계율곡과 더불어 변론한 편지글 1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이선이 쓴 해앙에는 선생의 정밀하고 해박한 학문, 통투한 지식, 나라를 빛낼 문장, 세상을 다스릴 재주를 가지고도 가문에 국한되고 당화의 액을 만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귀양을 가서 조금도 그 뜻대로 행하지 못하고 끝내 궁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세상을 마치시니, 어찌 우리 사문(斯文,유학)의 액과 지사들의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송시열이 쓴 묘갈문에는 토정 이지함은 말하기를 “천지는 마음 사이에 있는 것, 공맹의 도가 멀지 아니함을 믿겠네”라고 했고 상촌신흠공은 말하기를 “천품이 매우 높고 문장도 또한 묘하다”고 하였다. 택당 이식공은 말하기를 “타고난 바탕이 깨달음이 투철하여 정밀하고 미세한 곳까지 명백히 해결한다고 했다”

승평 상공, 김류는 “내가 오늘이 있게된 것은 친히 구봉에게 가르침을 받은 힘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밖에 시집후서에 정엽, 신흥, 김장생이 쓴 서문이 있으나 지연관계상 생략한다. 구봉선생이 도피생활을 말년에 하게 된 것은 구봉의 나이 51세에 이이가 죽자 동인측의 이이에 대한 공격이 더욱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귀(李貴)가 망사(亡師)인 이이에 대한 모함과 비방을 번명하고자 상소 하였는데, 상소문을 구봉이 기초해 준 것이 동인측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동인들은 구봉을 서인의 모주(謀主)로 단정하고 해치려고까지 했으며 구봉을 제거 하기위해 안담의 자손을 부추겨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게 되었다.

특히 이이가 죽자 이발과 유양의 무리가 이이와 성혼을 미워하였고 이산해가 우봉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오늘의 화를 아는가? 그 빌미는 율곡에게 있으니 만약 무리들을 따라 꾸짖고 비방하면 화를 면한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비록 죽는다한들 어찌 차마 그렇게 할수 있으리오?”라고 했다. 안씨가에서 이미 소송을 일으켰고 선생은 화를 또한 헤아릴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피신을 하였으며 정철 김장생 이산해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구봉 선생이 말년에 거주한 곳은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 아들 부부와 함께 살게 됐으며 김장생도 아들김집, 김반을 데리고 와서 짐 푸는 것을 도왔다.

이 농막의 주인은 김반과 친분이 깊은 첨추 김진려였다. 훗날 김진려와 김반은 사돈을 맺게 된다. 그후 안민학이 찾아와서 송구봉의 말년의 벗이 되어준다.

그뒤 송구봉은 1589년(선조 32년) 8월 8일 충남 당진군 은거지에서 한 많고 파란만장했던 66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후 송구봉은 충청감사 홍계희가 왕에게 올린 상소에 의해 사헌부 지평이 주어진다.(1752년)

910년에는 홍문과 제학에 추증되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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