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통신장치가 개발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거나 외적이 침입하면 봉화를 올려 위급함을 알렸다. 그래서 봉화를 올린다는 뜻에는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3.1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충청도지방에서는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거나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는 일이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과 서로 뜻이 통했던 것이다. 이렇듯 봉화시위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있는 독립만세운동이었다.횃불 봉화시위는 특히 충청도에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송악면에서는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면사무소를 방화하려고 계획했던 주민들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이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송악면사무소를 방화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일제경찰이 송악면 사무소 방화계획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현장 출동하여 주요 혐의자로 8명의 주민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일제경찰은 이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송악면 사무소를 불태우려 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사전에 진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송악면사무소 방화 계획은 미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송악읍 사무소가 있는 송악면 기지시리는 원래 이름이 틀못이다. 틀못이라는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 바다가 기지시 앞까지 이르던 시대, 뱃사람들이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중요했던 뭍을 이르러 틀뭍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기지시가 그렇게 중요한 뭍이었다는 설이다.이렇게 불리던 틀뭍이라는 지명이 시대가 지나면서 틀못이 되었고, 틀못이 다시 틀무시가 되어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기지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틀무시를 한자인 기지시로 표현한 것은 틀무시의 원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독립만세운동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급적 3.1혁명을 은폐 축소하고자 했던 일제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증언을 통한 발굴도 생존자의 부재로 인해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바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감안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만세운동 발굴에 적극적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의 천도교 조직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준비 단계부터 모든 조직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대호지의 대표적인 천도교도이자 면서기였던 민재봉은 실무적 역할을 도맡아 하였고, 이대하, 남상락 등 역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천도교인들이다.그 결과 대표적인 천도교인들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대거 체포되는 등 탄압을 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호지면 송전리 출신으로 일찍이 천도교에 입도하여 활동했던 이달준은 대호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와 정미면은 3.1혁명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이다. 보통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라고 하면 1919년 4월4일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대호지와 정미면에서는 더 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이렇게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으로 이해할 만하고, 2차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당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체포되어 일제에 탄압을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항소하고 법정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항소를 통해 처벌이 크게 감형되는 것도 아니고 재판 결과가 확정되어야 형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만큼 수감 기간이 연장될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과 같았다.남상락은 항소를 통해 경성복심복원에서 8개월로 감형 받았지만 남상락의 징역살이는 출감한 날이 1920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남상락은 대호지면 도이리 출신으로 1892년생이다. 대호지면 도이리는 의령남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남상락 역시 의령남씨였다. 도이리 의령남씨들은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종숙을 운영하였는데 후일 타성도 받아들여 사숙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남상락은 사숙인 도호의숙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한학을 배웠다. 성장한 이후에는 대호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대호지면에 널리 퍼져있던 천도교에 입도하여 천도교인으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남상락이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도교적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천의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당진경찰서에서 출동한 이궁(二宮)과 고도(高島) 순사가 무리하게 태극기를 빼앗으려다 총을 발사하면서 시위의 양상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결렬한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평화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돌아가려는 시위대를 향해 일제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니 시위 군중이 순사들을 붙잡아 폭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송재만은 앞장서서 ‘저놈들은 총을 쏜 자이니 때려 죽
행동총책임의 역할을 맡은 송재만은 고수식, 김장안, 김팔윤, 김홍진, 남상은, 송봉운 등 청년들을 행동대원으로 조직하고 인원동원과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필요한 실무적인 일을 도맡았다. 4월2일 밤 면사무소에 모인 송재만, 김동운, 강태완, 민재봉 등의 면서기들은 김동운이 제안한대로 “도로수선병목정리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4월4일 이른 아침부터 각 마을은 그 담당 구역의 도로를 수선하라는 내용을 기재한 면장 명의의 공문 8통을 작성하였고, 다음날 송재만과 민재봉이 출포리 임용규, 송전리 민두훈, 도이리 남상현, 사성리 박희탁, 적서리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동자 중에는 대호지면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면장과 면서기들이 있었다. 면장이던 이인정과 면서기였던 강태완, 김동운, 민재봉 등이 그들이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대호지면민 다수가 참여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이들 면서기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였던 면사무소 종사자들이 주도했던 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면장과 면서기는 대체로 일제의 통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은 인원은 모두 39명에 이른다. 이중 이인정, 한운석, 김양칠, 송재만은 항소와 상고를 통해 끝까지 법정투쟁을 이어 갔지만, 남주원은 1919년 10월25일 1심 선고 이후 별도의 항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써 남주원에 대한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남주원이 출감한 것은 1920년 10월23일이었다.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실제 징역살이는 꼬박 1년6개월을 한 셈이 된다. 이렇듯 일제의 법집행은 합법을 가장한 독립운동 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1919년 당시는 일제가 3.1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잔혹한 탄압도 서슴치 않았던 때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3.1혁명이 격화되자 일제는 감시와 탄압은 물론 밀정을 보내 정보 수집을 하고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사전에 알아내서 독립만세운동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대호지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비밀스런 준비가 필요했다. 남주원은 원래부터 손님의 출입이 잦았던 자신의 사성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면의 대다수 면민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면민 다수가 한 마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중 향촌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 오던 유림 중심의 문화, 문중의 존재와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물론 조선말기 대부분의 유림들은 성리학을 교조적이고 원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조금의 차이도 인정하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아 세상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성리학과 유림의 한계는 나라를 몰락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제 검찰은 이인정에게 보안법위반, 소요, 출판법위반, 공문서위조행사 등을 적용하여 재판에 넘겼다. 결국 이인정은 10월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이인정을 비롯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항소하여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이인정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으로 감경되었다.그렇지만 이인정은 경성복심법원의 감형판결에 만족할 수 없어 다시 상고하였다. 이인정은 상고 이유로 “우리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면 사무소에 모인 면민은 모두 4~500명에 이르렀다. 면사무소에는 송재만이 준비한 30척 대나무에 옷감으로 만든 태극기가 펄럭였다. 도로 수선을 하겠다고 해서 모인 주민들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주민들은 여기저기서 웅성이고 노닥거리기도 하였지만 긴장한 모습이 역역했다. 면민들이 모두 모이자 이인정은 주민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하였다.“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여럿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대호지면 면장이던 이인정의 역할이 매우 컸다. 면장이 직접 독립만세운동을 하고 나섰기 때문에 대호지면 면민들이 모두 독립만세운동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인정은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만하다. 실제로 전국에서 전개된 수많은 3.1독립만세운동이 있었지만, 면장이 직접 나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이러한 점에서 당시에도 주목을 끌기 충분했다.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와 정미면은 1895년 조선말기 군현을 정비하면서 해미군에 속해 있었다. 이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해미군, 태안군이 서산군에 편입되면서 해미군에 속해 있던 대호지와 정미면도 서산군의 20개 면으로 속하게 되었다. 대호지와 정미면이 당진군으로 편입된 것은 최근의 일로 1957년이다.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4일에 일어났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충청도 전역에서도 3월 말, 4월 초에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몽산 기슭에서 출발한 면천보통학교 학생들은 면천향교를 지나 면천읍내로 향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 모두가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은 학생들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였다. 박창신은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서 원용은과 함께 깃대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대오를 이끌었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을 마친 후에도 주동자를 자처하며 일제 경찰이 있는 면천 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러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당당한 조직적 대응에 일제는 주동자 박창신과 원용은을 구속하여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는 당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1911년 9월 개교하였으니 그 역사도 깊다. 이런 유서 깊은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면천이 당진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면천군의 소재지였고, 일제에 의해 당진군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군 소재지의 행정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면천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이렇듯 당진 최초의 면천공립보통학교 설립은 이러한 면천 사람들의 반일감정을 완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