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송악읍 사무소가 있는 송악면 기지시리는 원래 이름이 틀못이다. 틀못이라는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 바다가 기지시 앞까지 이르던 시대, 뱃사람들이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중요했던 뭍을 이르러 틀뭍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기지시가 그렇게 중요한 뭍이었다는 설이다.

기지시줄다리기 박물관에 재현된 옛 틀무시 장터. 사진제공=당진시청
기지시줄다리기 박물관에 재현된 옛 틀무시 장터. 사진제공=당진시청

이렇게 불리던 틀뭍이라는 지명이 시대가 지나면서 틀못이 되었고, 틀못이 다시 틀무시가 되어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기지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틀무시를 한자인 기지시로 표현한 것은 틀무시의 원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다. 따라서 기지시는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을 아무렇게나 한자로 바꾸어 놓은 지명에 불과했다.

이렇듯 틀무시는 뱃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시가 생겨나게 되었고, 인근에서 가장 번성한 시장이 되었다. 틀무시장이 얼마나 컸던지 보통 5일장을 열었지만 틀무시장터 만은 1,3,6,8일에 연이어 장을 열어야 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틀무시장터에서 3.1혁명이 일어났던 것은 1919년 4월6일의 일이다.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매일신보 4월13일자 보도를 보면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단순히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던 간단한 사건이 아닌 듯하다.

틀무시에셔도

당진군 송악면 긔지시에셔ᄂᆞᆫ ᄉᆞ월 오일 군즁 약 슈백명이 만세를 높이 불으고 ᄒᆞ산ᄒᆞ엿슴으로 쥬모될만한 자 ᄉᆞ명을 당디경찰서에 체포 취됴즁인ᄃᆞ녀쟈가 일명이오.

이상의 매일신보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4월5일에 틀무시장터에서 수 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매일신보에 보도된 기사는 조선총독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었던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이 보도되어 있다.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일제 경찰에 의해 미수에 그쳤던 간단한 사건이 아니라 수 백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고 해산하였던 사건이었고, 특히 주모자가 네 명이나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여자였다는 점이 특징이었으며, 이들은 당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정도로 중대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 조선총독부 기록에는 4월6일로 기록되었고, 매일신보 보도에는 4월5일로 되어있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라 4월6일로 날을 특정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선 조선총독부의 기록이 공식적인 보고를 토대로 기록하였다는 점과 틀무시장의 장날이 4월6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은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따라서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틀무시장이 열리는 4월6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을 것이지만 이를 매일신보에서 4월5일에 일어났던 것으로 오보를 냈다고 볼 수 있다.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틀이 지난 4월8일에도 송악면 기지시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지시경찰관주재소 일경들에 의해 사전에 탐지되었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진압되어 독립만세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역시 틀무시 장날인 4월8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월8일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매일신보에서 보도하지 않아 다른 기록이 없다. 따라서 4월8일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조선총독부 기록대로 미수에 그친 사건인지 실제로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진 사건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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