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박창신
박창신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는 당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1911년 9월 개교하였으니 그 역사도 깊다. 이런 유서 깊은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면천이 당진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면천군의 소재지였고, 일제에 의해 당진군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군 소재지의 행정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면천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이렇듯 당진 최초의 면천공립보통학교 설립은 이러한 면천 사람들의 반일감정을 완화하자는 측면으로 이해할 만하다.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은 원용은과 함께 또 다른 인물인 박창신이 주도한 만세운동이다. 원용은에 비해 박창신에 대해서는 기록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박창신이 이후 사회주의 활동에 전념하면서 한국전쟁 때 희생되었고, 이런 사정으로 인해 박창신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박창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많치 않은 탓이다.

박창신은 합덕 신석리 출신이다. 합덕 신석리에서 면천까지는 16km에 이르고, 걸어서 통학하였을 당시로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특히 어린 나이에 먼 길을 통학하려면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1919년 당시 박창신은 원용은에 비해 두 살이나 많은 18세였다. 원용은에 비해 나이도 많고 의협심이 강했던 박창신은 면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이런 박창신이었기에 원용은은 경성에서 보고 온 고종의 인산과 독립만세운동을 면천에서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처음으로 상의했던 당사자가 바로 박창신이었다. 그만큼 박창신은 원용은에게는 믿음직하고 신뢰할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원용은은 박창신에게 경성에서 본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면천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제안을 하였다. 원용은은 경성에서 직접 자기 눈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확인하였지만 박창신은 원용은을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인데도 원용은의 말만 듣고 원용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그만큼 박창신은 의협심이 강했고,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은 시작되었다.     

면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안한 원용은과 제안을 받은 박창신은 인근 덕산보통학교와 당진보통학교도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밀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인근학교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한 것이 누구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원용은이 시위 준비를 하는 동안 박창신이 밀서를 전달한 것으로 보아 박창신이 제안하고 직접 작성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박창신은 덕산과 당진공립보통학교를 찾아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하였다.

밀서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일에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하면 그는 인면수심(즉 사람의 탈을 스고 즘생의 마음 갖인 인간이라는 말)이라고 격려와 아울러 몹시 충격하는 모독적 협박적 문구’였다. 그러나 두 학교는 ‘후사가 두려워 통지문의 문장이 여하(如何)하다는 것을 이유들어 반려(叛戾)하였다’는 이종원과 원춘희의 증언으로 보아 밀서의 내용은 매우 격정적인 문장이었고, 덕산과 당진보통학교 학생들은 밀서의 문장을 들어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면천공립보통학교의 제안을 거부했던 것 같다. 이로써 충남 최초의 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은 면천공립보통학교만이 단독으로 벌이게 되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10일에 일어났다. 마침 거사일로 정한 3월10일이 일제의 육군기념행사일이었기 때문에 행사에 동원된 학생들이 행사를 마치는 대로 일찍 귀가하게 될 것이란 점을 이용하자는 계획이었다. 3월10일 원용은과 박창신은 4학년 급장이던 이종원을 통해 각 학년 급장들에게 전교생을 면천 향교 뒷산으로 모이게 하였다. 4학년 상급반 급장이 직접 나서 학생들을 모이게 하니 학생들이 쉽게 모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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