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송악면에서는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면사무소를 방화하려고 계획했던 주민들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송악읍 사무소
송악읍 사무소

이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송악면사무소를 방화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일제경찰이 송악면 사무소 방화계획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현장 출동하여 주요 혐의자로 8명의 주민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일제경찰은 이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송악면 사무소를 불태우려 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사전에 진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송악면사무소 방화 계획은 미수로 끝났다. 이때가 1919년 4월13일 틀무시 장날이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과 같이 송악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이후 6일, 8일, 13일 등 틀무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시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4월6일 독립만세운동은 수 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으며, 이로 인해 주동자로 의심되는 여자 1명을 포함한 4명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고, 이틀 후인 4월8일 틀무시 장날에도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었지만 사전에 탐지되어 미수에 그쳤다. 그리고 4월13일에는 보다 과격한 방식인 면사무소 방화계획이 있었지만 사전에 탐지되어 미수에 그쳤고, 관련 혐의자 8명이 체포되는 등 독립만세운동이 연이어 벌어졌다. 

따라서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우발적인 사건이거나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볼 수 없고,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조직적으로 준비된 독립만세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일제경찰은 사전에 첩보를 통해 미리 알고 차단한 미수 사건으로 축소하여 보고하고 기록하였다.

실제로 일제는 3.1혁명의 폭발적 확산에 놀라 정탐활동에 주력하여 사전에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탄압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첩보활동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경우는 의도적으로 사건 규모와 참여자의 수를 축소하여 보고하고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수 백 명의 참여자가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중대한 사건이었고, 체포된 관련자가 많았을 정도로 조직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관련자들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틀무시장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증언도 없다는 점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틀무시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는 있다. 특히 주동세력이 있었다면 누구였는지 밝혀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에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일이다. 
송악면은 옛 면천군 지역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의 맹장이던 이창구가 기포한 곳이 송악면 기지시리 국사봉이었고, 송악산을 점령하여 서해의 뱃길을 막고 웅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강렬한 인상은 1906년 병오년 의병투쟁으로 이어졌다. 전 참서관 최구현이 기지시에 창의도소를 설치하고 창의문을 내 걸었을 때, 인근에서 수 백 명의 농민들이 의병으로 참여하였고, 최구현 의병장과 함께 면천성을 공격하는데 앞장선 바 있다. 이렇게 틀무시에서는 불과 25년 전의 동학농민혁명과 13년 전의 의병투쟁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3.1혁명 당시 틀무시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바가 아니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 할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동자들 역시 틀무시에서 있었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06년 의병투쟁의 항일저항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던 세력으로 추정해 보는 것 역시 터무니 없는 추측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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