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면 조금리 전경
대호지면 조금리 전경

행동총책임의 역할을 맡은 송재만은 고수식, 김장안, 김팔윤, 김홍진, 남상은, 송봉운 등 청년들을 행동대원으로 조직하고 인원동원과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필요한 실무적인 일을 도맡았다. 4월2일 밤 면사무소에 모인 송재만, 김동운, 강태완, 민재봉 등의 면서기들은 김동운이 제안한대로 “도로수선병목정리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4월4일 이른 아침부터 각 마을은 그 담당 구역의 도로를 수선하라는 내용을 기재한 면장 명의의 공문 8통을 작성하였고, 다음날 송재만과 민재봉이 출포리 임용규, 송전리 민두훈, 도이리 남상현, 사성리 박희탁, 적서리 차영렬, 장정리 정원우, 마중리 남상익 등의 구장과 두산리 구장대리 김홍록의 집을 찾아가서 공문을 전달하였다. 구장들에게는 공문에 따라 집집마다 한사람 이상씩 대호지면 사무소로 꼭 모일 수 있도록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4월3일 밤 면사무소에 다시 모인 면서기들은 한운석에게 애국가 작성을 부탁하였다. 한운석은 작성한 애국가를 등사판 원지에 적어 일부를 인쇄하고 송재만에게 넘겼다. 한운석에게서 애국가 원지를 받은 송재만은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하여 400매를 인쇄하였다. 또한 송재만은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 제작에 쓰인 천은 자신이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가지고 있던 천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대형 태극기를 김순천에게 주어 30척 대나무에 매달아 4월4일 면사무소 앞에 게양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태극기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상징하는 깃발로 쓰였다.

4월4일 오전 8시가 되자 대호지면 사무소에는 4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었다. 송재만이 만든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한운석이 쓴 애국가를 적은 유인물이 돌려지자 주민들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남주원이 긴장한 면민들에게 술을 주어 용기를 주었다. 마침내 대호지면장 이인정이 나서 “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동군 정미면 천의 시장을 향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어서 남주원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자리에서 송재만은 최후의 일각까지 앞장서 싸우자는 취지의 선서문을 제창하였다.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나온 시위대는 천의장터로 이동하였고, 송재만은 인쇄한 애국가를 길가에 나온 면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렇듯 천의장터에 이르는 동안 송재만은 행동대장으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천의장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장정리 등의 마을에서 시위대에 속속 합류하게 하였고, 천의장터로 이동하는 동안 대열이 흩어지지 않도록 행동대원이 선두에서 대열을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이렇게 대열이 유지되어 이동하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시위대의 규모는 점차 불어났다. 그 규모가 얼마나 많았던지 천의장터에 이르렀을 때 천의주재소의 순사들은 대열을 가로 막았다가 감히 어쩌지 못하고 천의장터 주변에서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천의장터는 정미면과 대호지면뿐만 아니라 인근의 당진, 고대, 운산, 성연 등지에서 시장을 보기 위해 모여들 정도로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천의장터를 가득 메운 장꾼들은 대호지면에서 시위대가 장터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합세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위대의 규모는 금새 800명이 넘어섰고, 천의시장을 독립만세를 부르며 순회하는 동안 100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장꾼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 발동이 아니라 조선민중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었기 때문이다. 특히 천도교에서 조직적으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바여서 충남지방에서는 3월말부터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포지방의 경우도 4월이 시작되자마자 곳곳에서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당진신문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kimhr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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