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체포되어 일제에 탄압을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항소하고 법정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항소를 통해 처벌이 크게 감형되는 것도 아니고 재판 결과가 확정되어야 형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만큼 수감 기간이 연장될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과 같았다.

남상락은 항소를 통해 경성복심복원에서 8개월로 감형 받았지만 남상락의 징역살이는 출감한 날이 1920년 8월29일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수감 기간이 1년 5개월이나 되었다. 이후 남상락은 1919년 12월24일 확정 판결을 받고 1920년 1월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상락은 자신의 각오를 한시로 표현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지은 남상락의 한시는 독립의 염원을 표현한 옥중시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남상락은 한시를 통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가와 얼마나 절실하게 독립을 염원하였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영웅호걸(英雄豪傑) 누구인고
고해종적(苦海踪跡) 가소(可笑)롭다
무궁화(無窮花) 금수강산 언제나 이뤄본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그를 서뤄 하노라

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남상락은 출감 이후에도 여러모로 고통을 당하였다. 우선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함께 옥고를 치른 친형 남상돈의 죽음이다. 남상돈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출감한지 1년도 되지 않은 1921년 5월2일 사망하였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남상락 자신은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집요한 감시와 통제를 당하는 처지였다. 후일 남상락은 측량기술을 익혀 측량기사가 되었다. 남상락의 입장에서 측량기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남상락은 측량기사로 만주에 까지 진출하여 생활을 이어 갔다고 한다.

이후 남상락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29년으로 서산군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기사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29년 12월8일 3면에는 ‘각군부면회 결정’이라는 제목과 ‘충남 서산군 20개면 협의회원 선거 임명’이란 부제목으로 서산군 20개 면에서 선출된 서산군회 의원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 대호지면에서는 홍국현, 최병학, 차영렬, 남상익, 남상락, 이학순, 김석태, 김상보, 윤월문, 박동화 등이 서산군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를 공주발로 보도하였다.

군회는 1920년부터  조선인의 저항을 체제내로 끌어 들여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려고 만든 어용기구였다. 따라서 군회 의원은 일제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인물인 차영렬, 남상익, 남상락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들 중 차영렬과 남상익은 각각 적서리와 마중리 구장이었는데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일제로부터 처벌받은 기록은 없다.

이후 남상락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에 관해서는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남상락은 1943년 3월 28일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상락의 무덤은 대호지면 도이리 장잿말에 있다. 정부에서는 남상락에게 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1990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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