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 삼 / 월간조선 편집국장



<“국가가 되놈을 상대로 화친했다 해도 지금까지 오랑캐와 화친했다가 끝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신 상하가 마음을 합쳐 방비책을 세워야 마땅한데도 적이 물러간 1년 동안 대소 관원들은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우고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저 오랑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다시 우리나라에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이며 어떤 계책으로 방어할 것입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나라 장수를 임명하는 규정을 보면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명성과 직위의 고하만 고려하므로 임용된 자들 모두가 훈작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부귀가 극에 달했으니 전투에서 공을 세운들 무슨 득이 되겠는가’ 하며 제 목숨 구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조 14년(1636)에 조선은 또다시 여진족의 기습 침략을 당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12월 1일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친히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지 열흘도 더 지난 12월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사가 국경을 넘어 침략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국의 침략을 알게 된 것이 왜군의 부산 상륙 4일 후였음에 비해 이 당시는 12일이나 지난 후에 기별이 전해졌다.

조정이 변고를 들었을 때 적은 이미 안주까지 병력을 전개한 후였다. 그 유명한 만주팔기 기병대가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아 서울로 진격해 온 것이다.

12월 14일에 적이 송도(개성)를 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인조는 강화로의 파천을 결정했다. 그러나 강화로 가는 길이 이미 적에 의해 끊기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남한산성으로 향하게 된다.

왕이 황망하게 피난을 떠나는 모습은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음은 인조 14년 12월 14일 실록.

<임금이 수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군신 중에는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고, 성 안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 위해 남한산성을 떠났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산길이 얼어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자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강화로 가지 못하고 산성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40일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조선 개국 이래 오랑캐, 야만인이라고 업신여기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결심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홍명구 혼자서만 청나라 대군과 맞서 싸워

항복 소식이 알려지자 인조 15년 1월 28일 이조참판 정온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온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기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음식을 끊고 있다가 목을 맸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손들이 구조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들의 자살 미수사건에 대해 사관들은 이러한 논평을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과 절의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했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보지 않겠는가.>


궁중 신하들이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이던 그 시각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는 홀로 청나라의 대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인조 15년 1월 28일 실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가 금화에서 크게 싸우다 패해 죽었다. 홍명구가 적의 움직임을 듣고 자모성에 들어가 지켰는데, 얼마 후 오랑캐 기병이 경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별장 장훈에게 2000기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그 뒤 대가(임금이 탄 가마)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날랜 병사 3000명을 선발해 진두지휘하여 떠났다.

한편 병사 유림에게 동행할 것을 재촉했는데, 유림이 뒤따라오다가 강동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홍명구가 꾸짖기를 “임금이 화란을 당했으니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 더구나 적이 군사를 나누어 전투를 하도록 함으로써 남한산성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다” 하고 마침내 진격하니 적들이 도망했다.


금화에 이르러 적을 만나 수백 명을 베고 사로잡힌 백성과 가축을 되찾았으니 그 수가 몇십 몇백을 헤아렸다.

군사를 백전산으로 옮겼을 때 적의 연합군 1만 기가 침범해 왔다. 홍명구가 이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두 명의 장수를 죽였는데 시체가 즐비했다.

조금 후 적의 한 부대가 산 뒤편을 돌아 나왔는데, 말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 모포로 몸을 감싸고 밀어붙이며 일제히 진격해 오니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었다. 홍명구가 급히 유림을 부르며 구원을 청했으나 유림이 도망하는 바람에 휘하의 장사들이 많이 전사했다.

홍명구가 의자에 걸터앉아 관청의 인장을 가져다 부하에게 주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활을 당겨 적을 사살했는데, 몸에 세 개의 화살을 맞자 스스로 뽑아버리고 칼을 빼어 치고 찌르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실록에 의하면 홍명구는 사람이 영리하고 강직했으며 문장과 기량과 견문이 후진들 가운데 첫째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른 나이에 갑과(과거에서 제1등급. 1등인 장원, 2등인 방안, 3등인 탐화 세 사람을 일컬음) 장원으로 합격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관서 관찰사로 복무하여 서북 방어를 위한 여러 방안들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건의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전투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홍명구의 분전 소식이 알려지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구나” 하며 이조판서에 추서하라고 명했다.

또 장례 비용을 국가에서 마련하고 그의 어미에게 녹봉을 지급하며, 문려(집의 문과 마을 입구의 문)에 정표(사람의 선행을 칭송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했다.
또한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고

인조 15년(1637) 1월 30일은 조선 국왕이 청의 칸(汗:황제)에게 머리를 숙인 치욕의 날이다. 그 항복의 장면을 사관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필치로 기록해 놓았다.


<용골대와 마부대(청나라 장수 이름)가 남한산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했다. 임금이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소현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가 달려왔다.


임금이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했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했다.

임금이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예문과 검열의 통칭. 사관으로서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관직), 주서(승정원 정7품) 각 1인을 거느렸고 세자는 시강원(왕세자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유교 도덕을 수양시키는 일을 맡은 관청), 익위사(왕세자 호위를 맡은 관청)의 관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갔다.

멀리 바라보니 칸(汗;청 태종)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둥근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했다.


악기를 연주했는데,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임금을 진문 동쪽에 머물게 했다.
용골대가 들어가서 보고하고 나와 청 태종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렸으니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임금이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했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한 후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용골대 등이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했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화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임금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했다. 칸은 남쪽을 향해 앉고 임금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앉고 왕세자가 그 아래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했다.

우리나라 신하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화에서 잡혀온 신하들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했다. 차 한 잔을 올렸다.


칸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했다. 우리나라 신하가 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