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박사의 기획연재 2
❷ 합덕방죽에서 벌어진 합덕전투와 동학총의 의미


❶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앞선 합덕농민운동
❷ 합덕방죽에서 벌어진 합덕전투와 동학총의 의미
❸ 200여 년 전부터 전승된 합덕읍 점원리 상궁원 1반 마을 노신제
➍합덕방죽 가에 세워진 준설 기념비들
➎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합덕방죽 이야기


합덕전투에서 사망한 동학군 무덤. ⓒ이인화 박사 제공
합덕전투에서 사망한 동학군 무덤. ⓒ이인화 박사 제공

합덕전투는 갑오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이다. 전편에서 합덕부곡의 역사적 의미는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유민들이 천민으로 전락해 고통을 받았던 합덕읍민들에 조상들의 슬픈 역사로 우리 고장의 역사를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우리 고장의 소중한 역사다. ‘합덕동학총’에 입간판 등을 설치해 보존하고 역사기록의 현장으로 보존해야 할 입장이다.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동학농민전쟁 당시 당진의 기포 수는 면천과 당진 2곳으로 모두 최시형의 명에 의해 기포해 마을마다 포가 설치되고 사람들은 동학의 주문을 암송했다. 『대교김씨가갑오년피난록(大橋金氏家甲午年避亂錄)』에 「촌촌설접인」라 하고 있다. 

1887년부터 1895년까지 8년간 면천군 읍내면 성하리에 유배 생활을 하던 김윤식 외무대신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그 당시 동학도들에 대한 목격담을 “어제 동학도 백여 명이 원평 민가에 와서 자고 오늘은 개심사로 향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개심사로 가는 동학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누가 말해서 알았는데 보현동에 사는 이진사가 본디부터 동학을 금하고 배척하니 동도들이 이를 원통히 여겨 개심사에 모여 의논하기를 그 집을 때려 부수리라 하였다. 내포에는 동학도가 매우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난다. 이 또한 시운이니 통탄할 일이다”라며, 4월 9일에 1백여 명이 개심사로 넘어갔다고 했다. 

『대교김씨가갑오년피란록』 여러 곳에도 도소를 세우고 근처 동비들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경내에서 봉욕(逢辱)당하는 집이 십중팔구는 된다고 했다. 7월에 이르자 동학도의 활동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양반이나 부호들은 피난길에 나서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교김씨가갑오년피란록』에는 “동학도들의 습격이 두려워 송산 이도정가의 크고 작은 여러 집이 피난에 나섰고, 어제는 공림댁 전 가족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리고 자신도 7월 23일에 피난길에 나섰다”고 했다. 

합덕지역은 1893년 12월 그믐날 나성로․이영탁을 중심으로 800여명의 동민이 이정규의 농민 탄압과 착취, 연호를 농경지로의 개간과 수세 부과 획책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방화하는 등 불의에 항거한 바 있다. 

또한 퀴를리에 신부도 1892년 초 천주교 사제관 겸 성당을 짓고 사목활동을 시작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피신해 있어 교세도 13개 지역에서 11개 지역으로 줄고 교인수도 1990명에서 1806명으로 100여 명이 줄었다. 

아울러 1895년 양촌 본당의 퀴를리에 신부 사제관과 공세리의 사제관도 토비(土匪)들의 습격으로 파괴되고, 일부 집기들을 탈취당해, 외무대신 김윤식이 덕산 현감을 시켜 사제관을 수리해 주게 하고, 손실된 집기도 배상해 주었다고 한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당시 합덕전투는 「초토사이공비」(서산군 고북면 가구리)와 「보부상감의비(褓負商感義碑)」, 「증군무참의김공병돈유공비(增軍務參議金公秉暾有功碑)」(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도로변), 홍건의 『홍양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증군무참의김공병돈유공비」 배면에 「갑인(甲寅) 토수연적(討水沿賊) 계해우토합포적(癸亥又討合浦賊) 격파지(擊破之) 관군승승(官軍乘勝)-갑인일 합덕방죽의 적을 토벌, 또 계해일 합포의 적을 토벌하고 이를 격파, 관군 승승장구」라 하여 10월 20일에 합덕방죽과 합포(합덕읍 서야중고 입구, 즉 합덕성당 끝자락이 창리로 이곳을 합포라 칭한 것으로 사료됨)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홍건의 『홍양기사』 16일조에 “16일 비도(동학군) 수천이 합남 땅에 주둔하여 기세가 심히 커 관군이 가서 토벌하였다. 17일 덕산 한내(고덕면 대천리)에 이르러 적도가 감추어 둔 군기를 빼앗았다. 18일 돌아왔다. 19일 관군이 군영에 1천금을 상금으로 주었고 광천으로 출전한 장사에게 관전 400량을 주었다. 저녁 후에 덕산에서 원병을 청하므로 2백 명을 보냈다. 합남, 원평 등지에서 괴수 유치교를 잡아서 예산현으로 보냈다. 20일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싸움 나간 장사가 급보를 하였는데 관군이 덕산 한내(대천리)와 면천 남산(남산리) 적군 사이에 있어(합덕읍 성동리 성동산성을 일컬음) 형세는 외롭고 힘은 나뉘어 적과 대항하여 싸우기는 어려우니 300명을 보내 달라고 첩보가 왔고, 합덕 첩보가 또 와서 탄환을 청하여 100여 명의 장정이 수송해 주었다. 21일 관군이 합덕으로부터 회진해서 왔다. 비도 중 총을 맞아 죽은 수가 부지기수고 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5진으로 나누어 부역을 시켰고 먹이를 주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1894년 10월 20일 합덕전투를 위해 원병 300명이 왔고 100명이 탄환을 가지고 와 동학군들을 부지기수로 죽이고 동학접주 유치교 등 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21일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성동산성은 토성으로 흔적이 뚜렷하다. 

이처럼 합덕방죽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97년 당시 82세, 17세 때 시집와 합덕읍 대합덕리 6번지에서 살았던 박검의 씨 증언에 의하면 “전에 이곳은 합덕방죽으로 삽교천 물이 들어오면서 1980년대 양수장을 지었는데, 그 뒤가 방죽에 접한 곳이다. 일제 때 금광을 하면서 깊은 곳이 되었는데 전에 그 옆쪽에 살던 최씨의 자제 두 형제가 미역을 감다가 그곳에서 빠져 죽었다. 동학군들이 데려갔다고들 했다. 사람들이 이 곳이 큰 소나무가 꽉 들어찬 산이었는데 이 산을 동학군 무덤이라 했다. 지금도 아주 큰 무덤이 하나 있다”고 했다. 

1997년 당시 66세였던 김성태 씨는 “갑오년 가뭄 때 방죽이 말라 있었는데 관군과 접전을 해서 동학군이 대패했다. 동학군들이 포위되어 갈팡질팡하다 합덕 방죽 주변에서 죽었는데, 이 시신들을 모아 동학총을 만들었다. 너댓 개가 있는데, 수백 명으로 어른들로부터 들어왔다. 서산․태안 사람들이 많았기에 무덤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표동수(86세, 합덕읍 성동리) 씨는 “홍성 관군들이 와서 응전을 하는데, 홍주목사가 성동 토성을 이용해서 싸웠다. 그때 토성을 증수하여 군대를 주둔시켜 싸웠고 동학군들을 토벌하고 그 죽은 동학군들의 시체를 줄줄이 엮어 합덕읍 운산리 공동묘지에 묻어 현재도 수십 기가 있다”고 말했다.

합덕전투는 홍주 초토사 이승우가 홍주관할 지역인 합덕에 군관 김병돈(金秉暾) 등 초토병을 이끌고 와서 성동산성에 주둔하며 동학군과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지명화되어 있는 합덕연호 위의 산이었던 「동학군무덤」이 이를 증명한다. 정황으로 볼 때 동학군들이 합덕 연호가 풀숲이고 얕은 저수지로 전쟁이 벌어져 무참히 죽었을 것이다.

이는 1894년 10월 24일 있었던 승전목 전투와는 별개의 전투였다는 점이다. 『홍양기사』는 10월 23일조에 “10월 23일에 해미, 여미, 홍주, 원평 등지에서 농민군 십여 만이 둔취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합덕전투에서 죽은 동학군은 합덕인근 주변 농민들이었을 것이고, 『조석헌역사』에 “승전목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군이 면천읍을 점령하고 하루를 유숙한 후 일본군이 합덕으로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1894년 10월 25일(양력 11월 22일)에는 예산군 고덕면 구만포(九萬浦)까지 진출했다”고 한 것처럼 이 전투는 이미 내포지역의 첫 전투로 승전목전투가 있기 4일 전에 이승우가 토벌하고 지나갔던 전쟁이었다.

이 합덕전투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에 봉기한 전봉준의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11일 앞선 합덕농민운동과 더불어 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다. 전편에서 합덕부곡의 역사적 의미를 밝혔듯이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백제의 유민들이 천민으로 전락해 고통받던 합덕읍민들의 조상들로 우리 고장의 역사를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우리 고장의 소중한 역사다. 

‘합덕동학총’에 입간판 등을 설치해 보존하고 역사기록의 현장으로 보존해 알려야 할 입장이다. 

이 글은 본 필자가 1997년 「내포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라는 논문으로 전국문화원연합회 논문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당선되어 승전목전투, 송악산전투, 합덕전투 등을 최초로 학계에 알린 논문이다. 이 논문을 합덕읍지 『합덕의 역사와 문화』를 쓰며 재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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