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합덕방죽의 기원에 대하여
❷ 합덕방죽의 옛 모습에 대하여
❸ 합덕에 현덕왕후 권씨 생가지가 있다
❹ 합덕 주민과 아라비아인들이 교역했다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이인화 지리학박사/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합덕방죽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는 고지도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1913년에 제작된 지형도라고 생각된다. 

이 지도에는 합덕방죽의 모습을 정확하게 지형도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지도는 일제가 1914년 우리나라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이전의 모습이 담겨있다. 1914년 면천군 비방면, 범천면, 합남면과 합북면과 예산군 신종면이 통폐합되어 당진군에 합덕면에 편입되기 전 합덕의 중심지였던 합덕방죽을 접할 수 있다. 

현재 합덕성당과 서야중고등학교 지점에 세곡 등을 집산하던 동·남방에 창리(倉里)가 있어 소합덕으로 지칭되고, 합덕지 건너편으로 호수 둑이 띠처럼 이어져 있는 대호리, 은덕을 베푸는 골짜기 덕곡리, 호숫가 마을인 지변리, 합덕지의 원천샘이 있었을 응정리, 그리고 호수의 운무로 뒤덮였을 상운리와 하운리가 있었다. 

합덕방죽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성종 때 영사 홍윤성이 “홍주·합덕의 제방은 고려 때부터 쌓기 시작했고, 조선조에 이르러 정분이 또 감독해서 쌓았는데, 길이가 2천 7백여 척이고 일곱 고을이 수리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둑이 본래 낮고 약해서 이제 또 비로 인하여 터져서 무너졌으니, 청컨대 제언별감을 보내어 쌓게 하소서”하는 내용의 기록이 19번 나오는데 합덕제의 수, 개축에 영사 홍윤성, 암행어사 김유연, 목사 김이호 등이 수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축할 때 군민 3천여 명을 동원하기에 인근의 천안, 예산, 아산, 덕산, 면천 등의 주민 35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홍주목 조에는 ‘연지가 합덕에 있는데 연지 길이가 3060척이고, 관개하는 논이 130결이다’하였고, 충청도읍지(1845) 홍주읍 제언 조에는 ‘연제 둘레가 1만 1829척으로 홍주 북쪽 합북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3년에 제작 지형도에 보이는 합덕방죽 모습. 1914년 군현리통폐합으로 당진군에 편입되기 전 면천군 합남면과 합북면의 중심지에 있었던 합덕방죽 모습이다. 현재 합덕성당과 서야중고등학교 지점에 세곡 등을 집산하던 동남방으로 창리(倉里)가 있어 소합덕(小合德)으로 지칭되고, 합덕지 건너로 호수 둑이 띠처럼 이어져 있는 대호리(帶湖里), 은덕을 베푸는 골짜기 덕곡리(德谷里), 호수가 마을인 지변리(池邊里), 합덕지의 원천샘이 있었을 응정리(鷹井里), 그리고 호수의 운무(雲霧)로 뒤덮였을 상운리(上雲里)와 하운리(下雲里)가 있었다. ⓒ이인화 박사 제공
1913년에 제작 지형도에 보이는 합덕방죽 모습. 1914년 군현리통폐합으로 당진군에 편입되기 전 면천군 합남면과 합북면의 중심지에 있었던 합덕방죽 모습이다. 현재 합덕성당과 서야중고등학교 지점에 세곡 등을 집산하던 동남방으로 창리(倉里)가 있어 소합덕(小合德)으로 지칭되고, 합덕지 건너로 호수 둑이 띠처럼 이어져 있는 대호리(帶湖里), 은덕을 베푸는 골짜기 덕곡리(德谷里), 호수가 마을인 지변리(池邊里), 합덕지의 원천샘이 있었을 응정리(鷹井里), 그리고 호수의 운무(雲霧)로 뒤덮였을 상운리(上雲里)와 하운리(下雲里)가 있었다. ⓒ이인화 박사 제공

대동지지(1866)에 ‘합덕제는 옛 합덕현 동쪽에 있는데, 제방의 길이가 500여 보이고, 둘레가 20리이다. 물이 가득 차면 거대한 호수를 형성하고 남쪽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토양이 매우 비옥하고 관개를 매우 넓은 지역에 한다’고 기록되어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770년 홍봉한 등이 제작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옛 합덕방죽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영조 38년(1762)에 김양택(이때 병조판서)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홍주의 합덕제언은 우리나라의 3대 제언입니다. 신이 지난해 호서에 가는 길에 그 형지를 살펴보니 방죽 밑에는 네 고을 백성들의 전압이 합하여 수천 섬지기인데 모두 이 방죽의 힘을 입었으나 중간에 능히 수축하지 못하였습니다. 고(故) 상신 이종성이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 크게 수축을 더 하고 물을 잘 저장하여 백성이 그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오래되어 방죽이 깎여 떨어진 곳이 많아서 거의 마르고 메워지게 되었으니 진실로 애석해할 만합니다. 이는 비록 공언이지만 백성이 그 이익을 보고 있으므로 그 수축할 때를 당하여 백성이 자기 일처럼 보고 부역에 나아가기를 즐거워할 것이니 이 시기에 미쳐 도신에게 신칙하여 백성의 힘을 내어 수축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공제도 어찌 스스로 쌓은 것이겠는가? 또한 마땅히 백성의 힘을 사용해서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조 43년(1767)에 세운 연제중수비에 군수 홍양한이 읍의 장정들을 구하여 친히 공사를 감독하고 제방을 증축하여 소통시켰으며 녹봉을 출연하여 재목을 사서 수문을 설치하여 둑이 터지는 폐해를 제거하였다. 이에 물을 저장하고 내보내는 마땅함을 얻어 가뭄이나 홍수에도 재해가 없게 되었다. 

1938년 합덕방죽 모습-합덕방죽 둑방 앞 용충에서 바라본 합덕방죽 전경으로 방죽 안에 연꽃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인화 박사 제공
1938년 합덕방죽 모습-합덕방죽 둑방 앞 용충에서 바라본 합덕방죽 전경으로 방죽 안에 연꽃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인화 박사 제공

제방 부근에 사는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노래하기를 “우리 제방이 이미 우뚝하니 우리는 경작을 한결같이 하게 되었네. 그 누가 내려주었나? 오직 태수의 공이라네. 능히 힘써 베지 말지니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주었네. 오래 전해지기를 원하나니 떠나도 잊을 수가 없으리”라 하니 마침내 비석에 새겨 적는다고 하였다.

이런 합덕지의 현황은 면적 103정 2반 6무보인 관개 용수지로서 합덕리의 북쪽 구릉과 성동의 서남쪽 구릉사이를 흐르는 삽교천의 한 분류를 막아서 축조한 것이다. 

이 언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활모양을 형성하는데 그 연장은 1600m이다. 제방의 윗부분은 10m 내외이며 못의 관개면적은 354정보에 이르는 광활한 곳으로 남동쪽으로는 삽교천 연변의 기름진 전답이 펼쳐져 있다. 합덕지의 수심은 대체로 80cm였으며 물관리는 648명이 계를 조직하여 합덕지의 수축과 보호를 행하고 있다. 

임황은 제당(저수지 둑)의 내외 법선으로부터 일부 법면과 교차하여 왕버들, 때죽나무 등이 있다. 이들의 최대 흉고직경은 76cm로 산생하였다. 이들 사이 최근 보충하여 벚나무가 열생하고 있다. 1930년 벚나무 1000그루를 제방 위에 보식하였다. 최근에 1911년 10월, 1912년 8월 2차례 하였는데 그 이전까지는 저수지 둑에 각종 잡목이 빼곡히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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