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지리학박사, 충남문화재전문위원, 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덕숭산 등산로. ⓒ이인화 제공
덕숭산 등산로. ⓒ이인화 제공
이인화(지리학박사, 충남문화재전문위원, 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이인화(지리학박사, 충남문화재전문위원, 한국도량형박물관 설립자)

덕숭산(德崇山)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덕산도립공원으로 수덕산이라고도 불린다. 차령산맥 줄기로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계곡을 끼고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고 정상에 오르면 안면도와 서해도 눈에 들어온다. 

등산은 매표소-일주문-이응로 사적지 수덕여관-대웅전을 보고 왼편 담장을 끼고 돌계단을 오른다. 정상까지 1.91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계단등산로를 따라 사면불(백제 때의 유일한 사면불인 약사불, 아이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 재현)이 보이고-소림초당(만공스님이 참선하던 곳)-1020계단-미륵불 입상-만공탑을 지나 스님들의 수행처인 향운각을 지나 정혜사까지 송춘희의 출세곡이자 평생 간판 곡인 ‘수덕사의 여승’을 흥얼거리며 오르면 좋을 것 같다. 

이곳에서 다시 수덕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능선 삼거리에 이르러 덕숭산 정상(해발 495m)에 올라 나무숲 건너로 야트막하게 보이는 가야산을 보고 아담하게 정돈된 전답들을 내려다보며 봉산, 수암산, 오서산, 안면도, 천수만도 보았으면 한다.


<수덕사의 여승> 송춘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임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은 비구니 김일엽과 관련된 일화에 더해 1960년대 절대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의 본부인이 이곳에서 수행승으로 있었다는 설과 연계되었다는 이 가요.)


수덕사(修德寺)

덕숭산 수덕사 전경 모습. ⓒ이인화 제공
덕숭산 수덕사 전경 모습. ⓒ이인화 제공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로 덕숭산 자락에 있다. 사기(寺記)에 백제 위덕왕(554~597) 시기에 숭제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어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다는 백제 최고의 고찰로 경내 옛 절터에서 백제와당 등이 발굴되었다. 

건축물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고려자기,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은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국내 4대 총림 중의 하나인 덕숭총림이다.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전설, 수덕사와 정혜사 절명 유래

수덕사가 백제시대 창건되어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가람은 퇴락되어 대중창 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불사금을 조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자청하였다. 

이 여인은 미모가 빼어나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퍼졌고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하였다. 수덕각시는 원만하게 불사가 성취되면 받아들이겠다는 약조를 하여 3년 만에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대공덕주 정혜가 불사가 성취되었으니 떠날 것을 독촉하고 수덕각시는‘옷을 갈아 입고 나오겠다'며 옆방으로 들어갔으나 순간 바위가 갈라지며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람도 방문도 갑자기 사라지고 바위틈만 남아 있었다. 

그 이후 그 갈라진 바위틈에서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피어났다. 수덕각시는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여인을 사랑한 ‘정혜’는 인생 무상함을 느끼며 산마루에 올라 절을 짓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존 최초의 목조건물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이인화 제공
수덕사 대웅전. ⓒ이인화 제공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대웅전은 “至大元年戊甲四月十七日立柱 (1308년, 충렬왕 34)”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건립 연도가 명확한 현존하는 최고(最古) 목조건물이 되었다. 국보 제49호로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 맞배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며, 헛첨차를 써서 공포가 주두 아래에서 시작되는 백제계 건축양식이다.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소슬합장의 곡선, 이중량의 곡면과 함께 백제계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수덕사의 여승 일엽과 수덕여관, 나혜석, 이응로 화백

일엽 스님(1896~1971)은 본명이 김원주로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 최초의 근대 여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 여걸, 김일엽(金一葉) 선객

여걸 김일엽 선객. ⓒ이인화 제공
여걸 김일엽 선객. ⓒ이인화 제공

아버지는 목사, 자신은 여승, 1910년대 일본 유학과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언론계 기자로 ‘폐허’와 ‘삼천리’동인으로 논설도 썼고, 교사생활도 한 여성의 성 해방론자, 자유연애론자로 시대상에 맞서다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출가한 당대의 여걸이다.

일엽은 일본 유학 중 일본은행 총재의 아들인 규슈 제국대 학생이던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였으나 오다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 김태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수덕사를 찾아온 어린 아들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며 속세의 인연을 끊었던 그녀였다. 그때 나혜석은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어머니처럼 김태신을 돌보며 그림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유명한 동양화가로 성장하여 해방 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고, 조총련이라는 오해와 고초도 겪었다. 김천 직지사의 일당 스님이 되었다. 

이처럼 아들을 외면한 수덕사의 여승, 일엽은 우리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비구니였다. 유행가 ‘수덕사의 여승’ 탓에 수덕사는 한동안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기도 했었지만 그녀의 선사적 면모는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으로 평가해왔다. 

2) 여걸,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여걸,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이인화 제공 
여걸,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이인화 제공 

나혜석(羅蕙錫, 1896~1946)은 호는 정월이고 경기 수원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다. 21살 때 첫사랑으로 알려진 시인 최승구를 폐결핵으로 잃고 1920년 24살 때 김우영과 결혼했다. 

그녀는 그림뿐 아니라 신문·잡지에 여권과 자유연애, 생활 개선에 관한 글들을 발표한다. 1927년 외교관으로 임명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 및 미국 여행길에 올라 나혜석은 파리에 온 최린과 염문에 빠져 1931년 이혼을 당한다. 한동안 그들의 이혼 이야기로 장안이 들끓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조선 최초 구미 여행자로 사랑에 실패하고 동갑내기 친구 일엽을 찾아와 여승이 되기를 간청했으나 수덕사 고승 만덕 스님은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하는 수 없이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친구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키우고 그림을 가르치며, 이응로 화백에게 파리 꿈을 넣어주며 세월을 보낸다. 

나혜석은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 남편 따라 유럽과 미국 시찰도 다녀왔었으나 다른 남자와의 염문으로 이혼을 당하고 ‘순결과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는 이른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기도 한 자유 연애론자,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3) 이응로 화백

이응로 화백. ⓒ이인화 제공
이응로 화백. ⓒ이인화 제공

세계적인 예술가 이응로 화백(1904-1989)은 충남 홍성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1923년 상경해 해강 서화가 김규진의 문하에서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배웠다.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다. 1958년 프랑스로 가 콜라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1960~70년대에는 주로 동양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사의적 정신성을 국제적인 조형방식인 추상형식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꾀했다. 

21살에 집안 중매로 박귀희 여사와 결혼을 했고 대학교수가 되어 돌아와 어린 제자와 염분이나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파리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떠났다.

4) 수덕여관과 이응로, 나혜석, 박귀옥 여사 

이응로 화백 작품 문자추상. ⓒ이인화 제공 
이응로 화백 작품 문자추상. ⓒ이인화 제공 

이응로는 파리 유학을 다녀온 8살 위의 누나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수덕여관에 찾아가 나혜석에게 미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 되었다. 

나혜석은 이응로에게 파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고 5년이 지난 어느 날 수덕여관을 떠난다. 1944년 이응노 선생은 누님처럼 선생님처럼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정들어 버린 수덕여관을 사버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덕사 주변의 풍광을 화폭에 담는 일에 열중하다 1958년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을 이루고자 그가 가르치던 제자이자 연인인 박인경과 떠나가고 그의 부인 박귀희 여사는 수덕여관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을 마냥 보낸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1968년 이응로 선생이 동백림사건으로 한국으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반이 지나서 풀려나 박귀희 여사와 재회한다. 그 후 수덕여관에서 두 달 정도 몸조리를 하며 여관 뒤뜰에 놓여있는 마당바위에 ‘문자추상’작품을 새긴다. 

그리고 또다시 훌쩍 파리로 떠나가 버리고 파리에서 편지를 보내 이혼을 요구해 이혼 수속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1992년 이응로 선생은 귀국 전시를 앞두고 끝내 파리에서 눈을 감고 박귀옥 여사가 기거하던 수덕여관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이응로 선생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 있는 오리 그림이 걸려 있을 뿐이다. 

2001년 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희 여사는 9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현재 원형을 복원하여 각종 문화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만공탑

만공탑. ⓒ이인화 제공
만공탑. ⓒ이인화 제공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만공스님의 사상과 불교적 업적을 기리고자 1947년에 세운 석탑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탑에 새긴 글귀인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의미로 조국 해방의 소식을 접한 만공스님이 길가의 무궁화 꽃을 따서 썼다고 한다. 해방되어 모두 하나가 되길 기원한 만공스님의 뜻과 달리 서로 다른 이념에 의해 작은 나라가 지금까지 둘로 쪼개진 현실이 답답했나 보다. 

“세계 일화는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스님의 희망 사항에 그치고 말았지.”

“나 자신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너와 나, 이 나라 저 나라까지 하나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

김좌진과 만공스님의 일화

만공스님의 수많은 얘깃거리 중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공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막역한 사이로 교자상을 뛰어 넘은 이야기, 팔씨름한 이야기가 전한다.

“오늘은 힘 한번 겨뤄보시지요.” “소승이 무슨 힘이 있겠소.” 교자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가 장군이 먼저 앉은자리에서 상을 뛰어넘었다. 스님은 “대단하시네요.”라고 칭찬했다.

“스님도 한번 해보세요.”사양하던 스님은 가부좌인 채로 몸을 날려 장군 뒤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또 다른 힘겨룸은 팔씨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는데 일어나 보니 두 사람이 앉은자리의 방 구들장이 꺼져있었다. “힘을 겨루었다기보다는 두 분의 친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Tags #당진 #당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