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은

412 주기 구봉선생 추기 입한재 제향을 마치면서

                              당진문화원 향토사 연구의원
                              당진문화관광 해설사  남기은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지 단절이 없다.
우리 당진지역에 당진 유림에서 제향하는 곳이 두 군데가 있다.
문원사文苑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56~1615) 사당이 대호지면 적서리 소재와.
입한재立限齋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1534~1599) 사당이 시내 인근 원당동 소재다.
또한 유림의 당진향교는 당진초등학교 측면에 있다.
왜 오산 차천로 사당은 왜 문원사라 했는지? 구봉 송익필 사당은 왜 입한재라 했는지? 향교 춘기 추기 석전봉행을 왜 하는지. 또한 몇 분을 제향 하는지? 알고자 하는 이도, 깊이 파헤쳐 현대적으로 드러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알리고 전하고자 하는 학자도 많이 없다.
이는 정말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7.000편의 시를 남긴 차천로 선생은 중국에서도 동방문사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임진 왜란시 국방문서인 비변사록 등 정조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진 오산집 오산곡집 오산설림 가사로 강촌별곡 강호별곡 등7.000여 시상詩想 속에는 자연을 노래하며 국가  당면 안위를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현 정세를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가 당면시대 상항 국가 번영과 발전 안녕을 기원하고 염원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시詩들이다. 그리하여 글의 동산이다 하는 문원사 가 존립 되어진 듯하다.
조선시대 대 학자인 구봉 송익필은 누구인가.?
송익필은 어려서 문장에도 출중하였고 재능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서출庶出의 신분이라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어울렸으며 이산해·최경창 백광홍 최립 이순인·윤탁연 하응림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심의겸·이이 성혼 ·정철 등과 교우하였고 파주의 5인방으로 불리며 정치적 의리를 함께하는 동지가 되었다. 이들의 이런 면을 두고 이준경은 장차 붕당이 만들어질 것을 우려하여 선조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오히려 신진세력 이이 등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송익필은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 사림의 대가로 손꼽혔고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여 서인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사림의 처사로 고매하게 행세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명망으로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을 첫 제자로 받아들였고 김장생 또한 예학의 대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 감악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그를 추종하는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가 양성한 제자로는 정엽 ·서성 ·정홍명 ·김반 등이 있으며 조정의 두터운 서인세력으로 포진하였다. 이후 그의 학맥은 김장생 아들 김집 을 거쳐 송준길 최명길  숙종 대 노론의 영수 송시열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586년(선조 19년) 신사무옥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절치부심 하던 안처겸 의 후손들이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된 사건임 밝혀지고 안 씨 집안의 사람들은 신원이 회복되었다. 이에 송익필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사노비였음이 드러나고 송사를 통해서 안씨 집안의 사노비로 환속되었다. 송익필은 성씨와 이름을 바꾸어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때 당진과 인현이 되어 송산면 매곡리에 은거 생활중 율곡이 찾아와 산을 바라보며 은거생활의 고통과 우정의 회포를 나누며 바라 보았다 하여 신평 망각산 이 되였다는 일화도 있다     
구봉 선생께서는 인류의 사표인 공자도 위편삼절韋編三絶 ,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 끈어 지도록 읽었다는 주역 책을  습득하여 그 모든 깊고 높은 학문의 경지를 생활화 하며 현실화 하였다 전 한다.
자동차보다 빨리 걷는다는 축지법을 사용 했다는 기록도 있고, 거북선 초안을 만들어 율곡 에게 줬다는 일화도 있다.
당대의 영남학파의 대가이며 명재상 인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버금가는 대학자로 유명하다.
당신의 신분이 미천한 서족이라 하여 그 깊고 높은 학문과 실력이 넘쳤음에도 관직에 등용을 못 한다.
오직 학문에만 전념 생활화 하고 후진 양성에만 온 힘을 다하였다 한다.
문하에 김장생 이란 수제자가 수학을 했다.
제자 김장생 사서삼경 을 마칠 무렵 너는 이제 나에게서 그만 배우고 율곡 이이 선생에게 가서  배워라 그래야만 너에 앞날 출세 길에 지장이 없다  하며 율곡에게  보낸다.
율곡 문하로 간  김장생 은  열심히 수학하여  조선의 큰 학자로 벼슬을 하게 된다 그는 관직도 잠시뿐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 구봉에서 배운 많은 학문을 토대로 율곡에서 배운 학문 성 혼 에서 배운 학문 종합하여 후학양성 교육에 전념하여 당대 명재상 많은 학자와 영의정 을 배출하였다.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영의정 지천 최명길 등 많은 당대의 비중 높은 많은 명사 인물이 그분의 문하=(제자)에서 배운 분들이다 .
동양 문화의 시원인 한문을 교육하고 생할화 하던 유림을 살펴보자
향교의 춘기 추기 석전제 는 문선왕 공자를 비롯한 오성 육현 십철 중국 명인 21인과 아국(한국) 18현을 제향 하는 행사이다.
유림에는 오상이라 하여 인,의,예,지,신 인간의 덕목과 도리의 학문이다. 물론 좋은 면도 많고 현대적으로는  지루한 면도 많다.  행동 일 처리를 느리게 하는 사람에게 흔히 “한문세월이구먼” 라고 한다. 한문 학문은 물론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 깊은 경지에는 무한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듯하다.
또한 아시아 동양의 문화는 한문 문화권에 속해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문화 한문은 영어보다 더 많이 쓰인 다 전한다.
우리가 서양 문화를 접하면서 많은 종교가 탄생 되어있다, 거기 성경 한 페이지를 열어 보구 단어 어원 어휘가 무었으로 되어 있는가 살펴보자  바로 60%가  한문 어원 어휘이다.
해서 한문의 중요성은 매우 대단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리 중요하기에 중국에도 버려졌던 공자 사상을 복원하고 있으며  한국의 역대 국무총리 께서도 전원이 한문의 중요성을 깊이 선양강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나 집착된 한문 문화 유림의 정치는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좋은 면도 많았지만 인권에 대한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잔인한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반면 인,의,예,지,신 을 숭상 강직한 면도 또한 많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황 희 정승 영의정 위치에서도 집에 는 빗물이 새어 항아리에 빗물을 받았다는  맹사성 같은 인물을 상기해보자,
우리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으로 꽃을 피웠던 유림문화 인륜도덕을 중시한 문화 오륜삼강 등배워 나가야할 좋은 진리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너무 장황 하여 현대적으로는 버려야 할 부분도 많다.
근대 문화에 접목된 실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분들의 진리처럼 당면 시대의 중요성은 절실하다.
굴뚝 없는 문화 관광사업, 깊이 있는 관광자원은 보완 개발하여야 함이 절실하다.
412 주기 구봉선생 입한재 제향을 마치면서  짧고 낮은 지식으로 구봉의  깊고 높은 학문 위업 일부를 소개하고 훌륭한 사적지 입한재 문원사가 관광자원의 사적지로 거듭나 개발되어 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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