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나전 柳正魯교장 선생님의 영전에

당진중학교 8회 졸업생

칼럼니스트 강정의 柳正魯 교장선생님 ! 지난 주 10월 18일 오후 원고를 정리하던 시간에 평소 자별하게 지내는 친구 기영( 교장선생님의 큰아드님)이의 목소리가 핸드폰으로 전해 왔습니다. - 친구, 아버님 돌아가셨어. -순간 나는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 보았습니다. 허, 허 참 - 내가 못난이구나, 부족한 사람이구나, 교장선생님에게 큰 죄를 지었구나하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최근 불편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빠른 시일안에 한번 찾아 뵈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별세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후반 지금부터 50여년이 더 흘러간 때를 회상해 봅니다. 당진 읍내 서쪽에 위치한 기합산 아래 6.25전후 어린 중학생들의 배움터로 당진 중학교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넓은 운동장 정면에는 구령대가 있었지요. 월요일 아침 조회 때는 교복과 교모를 쓴 학생들이 먼저 운동장에 도열하여 있으면 교장선생님이 단에 올라서서 훈화를 하셨습니다. 작으마한 키에 꼿꼿하신 자세, 카랑카랑한 그때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것은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다.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교장 선생님은 당진이 고향인 지금 6,70대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1919년 기미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운산면 여미리에서 태어나시어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해 현재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고보를 마치고 일본 교토에 소재한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 ( 조도전)에 유학, 졸업한 후 귀국하여 교육공무원으로 당진중학교를 비롯한 충남의 여러 곳에 근무하시다가 마지막 대전에서 정년 퇴임을 하시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퇴임후 고향인 운산 여미리와 서울에서 지내시면서 옛 제자들을 무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교육자, 학자,정치가, 군인, 사업가 등 수많은 제자들이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삶의 지혜를 삼고 지냈습니다. 올해 95세인 교장선생님은 평소 제자들의 이런저런 소식을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저와는 이런 인연들이 있습니다. 1980년대 일입니다 제가 그때 당시로서는 좀 젊다고 보았던 40대 중반나이에 초임 교장이 되어 서산에 근무할 때 가을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운동회 개회식에 참석하신 교장선생님은 본부석 중앙에 있는 교장석에 앉으시라고 몇 번 권해도 “아이구 거기는 자네 자리가 아닌가” 하며 극구 사양을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으셔서 젊은 교장인 저를 대견하게 바라보셨습니다. 달리기에 입상하여 대표로 상품을 받으러 온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이 직접 시상해 주시기를 말씀드렸더니 “그건 내가 하지” 라고 흔쾌히 말씀하시면서 상품인 공책 묶음을 아이들에거 주시고 인사를 받으실 때 그 흐믓해 하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천안에 근무할 때도 스승의 날 운동장 전체 조회때 참석하시어 제가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교장선생님은 나이지만 나도 너희들처럼 훌륭하신 교장선생님이 계시다. 바로 이 자리에 오셨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나의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아라” 라고 하며 노 교장선생님을 소개 했을 때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고 경청하는 모습을 보시던 교장선생님의 그 환한 얼굴 모습이 떠 오릅니다. 그 즈음 교장선생님의 장 손주인 서호가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일 때 서호와 서호의 친구를 학교로 초청해서 고학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부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 대담을 한일이 있었지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아주 좋아 했습니다. 교장선생님도 참 좋아하셨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5월 스승의 달이 되면 승용차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교장선생님이 가보시고 싶은 곳을 두루 찾아 다닌 영광도 저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입니다. 언젠가 산행겸 고적을 둘러보러 서울 망우리 묘원을 걷는 중에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사람들의 묘비 앞에서는 세월의 무상함인가, 한동안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한참동안 머물러 계셨습니다. 아차산 꼭대기에서는 저 보다 앞서 가시면서 뒤에 오는 저를 보시고 - “어, 강교장 자네 어려운가? 건강할려면 평소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걷고 운동을 꾸준히 하고 소식을 해야 하네”라며 건강에 대한 노하우를 전해 주셨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혜봉이라는 호를 붓글씨로 써서 우편으로 보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 신문이나 잡지등에 쓴 칼럼과 저서를 보시고 앞으로도 글 속에 지혜를 담아 쓰라는 마음으로 호를 지어 보낸다는 내용의 글이였습니다. 저는 교장선생님의 그 서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언제부터인지 수년간 가을이면 시골에서 손수 가꾸신 쌀을 꽁꽁 묶어 한 포대 서울 저희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작년에는 직접 작업하신 노란 은행을 바카스 박스에 담아 소포로 보내셨습니다. 교장선생님! 참 고마웠습니다. 해마다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면 교장선생님이 좋아하실 어리굴젓을 보내드리면 받아 보시고 꼭 -“강 교장 잘 받았네 고맙네” - 하시던 목소리를 이젠 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번 추석에는 전라도 갓김치를 보내드렸는데 친구인 기영이한테 잘 받았다는 전화가 왔드군요. 그 때 교장선생님은 전화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별세 소식을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난 10월 20일 교장선생님은 생전에 존경하던 사람들의 추모속에 고향인 여미리의 영원한 안식처로 가셨습니다. 나전 교장선생님 - 언젠가 파주에 있는 황희 정승의 묘소앞에서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생각 납니다. - 제가 ” 교장 선생님 - 인생이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한참 하늘을 보시다가 - “그런 질문 강교장 답네 지금 자네가 법사가 되어 그런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그저 한 바탕 꿈이라고 보며 살면 좋을것 같네” - 순간 저는 교장 선생님이 아닌 스승님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소 마음 가르침을 하시던 스승 나전 교장선생님이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교훈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습은 가셨지만 마음은 늘 스승이 되셔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지켜보고 계실것입니다.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 스승님의 생전 살다가 가신 모습이 저의 마음속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평소 존경하던 스승님의 뜻에 못미치는 생활을 하는 모자란 나를 탓할 뿐입니다. 나전 교장 선생님 - 교장선생님이 영원히 가시던날 구월 보름달이 환하게 교장선생님의 묘소를 비취는 밤입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못 부르는 노래지만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 ‘살다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교장 선생님! 평안히 잠드소서 - 2013 년 10 월 서울에서 제자 혜봉 강정의 올림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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