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당진시 합덕읍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

신리성지의 모습.
신리성지의 모습.

[당진신문=이석준 기자] 당진 지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많다. 예산이 투입돼 활발하게 복원되고 관리되는 곳들도 있으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문화유적지도 있다. 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지역의 소중한 자산인 당진의 역사문화유적지를 조명해보려 한다. 지역 내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당진시 합덕읍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 이곳을 포함한 일대를 신리성지라고 부른다. 신리성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돼있다. 이 지역은 현재 삽교호 방조제의 완공으로 인해 넓은 평야지방으로 변했지만, 삽교호 방조제 완공 이전까지만 해도 이 주변은 온통 습지로 밀물 때 해로를 통해 배가 드나들었던 지역이었다.

신리 지역은 초기 천주교 발원지 중 하나로 내포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고, 해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해 외국인의 출입이 많았다는 점과 조선 후기까지 내포 지방이 양반의 유배지 또는 관리들의 좌천지 정도로 취급받아 다른 지역에 비해 양반 세력의 영향력이 약했다는 점은 내포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 다블뤼 기념관 꼭대기에 위치한 십자가.
성 다블뤼 기념관 꼭대기에 위치한 십자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다블뤼 주교는 신리 지역에서 21년을 머무르며 선교 활동을 진행했는데 조선말을 아주 완벽히 잘했다고도 전해진다. 초가집에서 머물며 낮에는 구들장 아래 비밀공간에 숨어 조선의 역사와 민중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저서를 집필하거나 천주교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했고, 밤에는 천주교인들을 모아 설교를 진행했다.

다블뤼 주교가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선교에 힘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블뤼 주교가 프랑스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유추 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양반 계급의 악랄함을 강도 높게 비난했는데 심지어는 조선의 왕(철종)도 양반 계급에 의해 고통받는 존재로 봤다. 조선 왕과 백성 모두 권력을 남용하는 양반 계급에 게 착취당하고 고통받고 있다 기록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지독한 폭정을 가한다. 양반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고 평민을 약탈, 구금, 착취하는 데 수령이나 관리를 포함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못한다”

“어떤 풍자 그림에서는 조선을 머리와 팔다리는 앙상하고 가슴만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사람에 비유한다. 국왕은 수입이 거의 없고, 백성들은 굶어 죽는 반면 어떤 양반들은 부와 쾌락, 권력이 넘칠 만큼 풍족하게 산다”

“조선의 국왕(철종)은 인간적인 마음씨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다. 국왕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치세를 걱정하며 근심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하나다”

-다블뤼 주교 서한 필사본 중 일부-


다블뤼 주교상.
다블뤼 주교상.

이처럼 다블뤼 주교는 조선 양반들의 악랄함을 지적하면서도 조선은 야만적인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조선 민중들이 가진 정과 공동체 정신, 상부상조 정신 등을 열거하며 이는 유럽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결한 정신으로 묘사했다.


“조선에서 자선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이를 거절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러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한다. 또한 일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기 밥을 나눠주며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을 초대해 모든 것을 나눠준다. 여비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 조선인이 가진 덕 중 하나다”

-다블뤼 주교 서한 필사본 중 일부-


이 모습은 당시 조선 향촌 사회의 생활 관행을 묘사한 것으로 다블뤼 주교의 관점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나눠주고 먹을 것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모습은 형제애에 기반 한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천주교 정신과 일치했다. 따라서 조선에 천주교가 싹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들은 인간사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원리들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면 조선 사회는 쉽게 건실한 사회가 될 수 있고 또한 필연코 그렇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잘 지도하면 그들에게 결여돼있는 신성의 개념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다블뤼 주교 서한 필사본 중 일부-


다블뤼 주교는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 될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21년 동안 선교 활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의 생각과는 달리 1866년 흥선 대원군에 의한 대규모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인해 6천 명의 천주교 신도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됐다. 거더리(지금의 신리 일대)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다블뤼 주교는 조선말에 능통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면서도 천주교 신념을 꺾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 교리를 설파해 더욱 모질게 고문을 받은 후 결국 처형됐다. 

신리성지 내에 위치한 다블뤼 주교관.
신리성지 내에 위치한 다블뤼 주교관.

그로부터 20년 후 조선에서 천주교 신자를 모으는 것은 허용됐지만 천주교를 믿다 몰살당한 기억이 남아있는 신리 지역은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도 살지 않는 마을이 됐다고 한다. 

신리성지는 넓디 넓은 푸른 잔디 공원과 아름다운 미술 조형물 등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끌지만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성인들과 수많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흔적 또한 남아 있는 곳이다. 신리성지와 더불어 솔뫼성지, 합덕성당 버그내 순례길 등을 돌아보며 모진 고문,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신념을 꺾지 않았던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순교자들의 흔적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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