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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당진신문 역사산책] 3.1혁명을 지원하고 참여한 순성출신 강선필Ⅲ

2018. 09. 04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경성시내에 배포된 격문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격문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이 격문을 통해 독립만세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격문을 통해 독립운동 소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격문을 보고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유통되는 격문은 전국적으로 유포되어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입장에서는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행위를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출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체포하고 탄압하였다. 박노영을 비롯한 강선필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제작 배포한 “동포여 일어서라!”는 제목의 격문은 일제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일제는 박노영 등이 격문을 배포한 당일인 3월8일 격문을 배포하고 박수찬의 하숙집에 모여 휴식 중이던 박노영과 박수찬을 체포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종로경찰서.
일제 강점기 시절 종로경찰서.

이렇듯 박노영과 박수찬 등이 체포된 것은 단순한 시위 참여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했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문제로 인식하여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써 격문을 제작하고 배포한 과정이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강선필이 제공한 자금으로 격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강선필이 이들에게 제공한 자금은 모두 10원이었다. 일제강점기 학생들에게 10원이란 매우 큰 돈이었다. 당시 경성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이 한 달을 생활비와 학비로 쓸 만큼 거액이었다. 함경도에서 유학 온 박수찬은 함경북도 도청에서 월 8원과 고향집에서 7·8원씩 받아 유학하고 있다고 했다. 일제 경찰에 잡혀 온 강선필은 박수찬에게 제공한 10원은 격문을 제작하는데 쓰라고 준 돈이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아버지가 상경하여 학비로 쓰라고 돈을 주었지만 갑자기 귀향하게 되면서 경성에 있을 수 없게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돈이라서 친구인 박노영과 박수찬이 식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딱한 사정을 알고 빌려 준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러한 강선필의 변명은 일제 경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일제 경찰은 강선필이 돈을 준 박수찬과 박수찬에게서 돈을 건네받은 박노영에 대해 강선필이 어떤 목적으로 거액을 주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결국 강선필이 주장했던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빌려주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박수찬은 신문조서에서 말하기를 강선필이 “신문이 최근 보이지 않는데 누가 인쇄하고 있는가? 또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고 물었다”며 3월7일 “돈 10원을 주면서 박노영에게 전해주라고 하였고, 요즈음 신문이 발간된다는데 거기에 기부를 하고 싶다”는 뜻으로 돈을 건네주었다고 진술하였다.

박노영도 박수찬이 돈을 주면서 “이 돈은 강선필으로부터 얻은 돈인데 그대가 인쇄를 한다든지 무엇인가를 하는데 사용하라면서 준 것이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박노영은 이렇게 받은 돈을 “2원은 원지대, 95전은 잉크대, 1원은 하숙에 지불하고, 1원은 박수찬에게 주고, 50전은 신태악에게 주고, 31전은 연초대 등에 소비하였고, 나머지가 4원 24전 있었는데 압수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로써 강선필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박노영 등과 함께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공범이 되었다.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강선필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자금 지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3.1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친구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있는데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귀향하는 것이 매우 미안했을 것이다. 이러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강선필은 박노영 등에게 자금을 지원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선필이 한 자금 지원으로 말미암아 박노영 등은 격문을 제작하고 배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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