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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3.1혁명을 기록하고 널리 알린 정미 출신 이종린Ⅲ

2018. 05. 21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독립신문』이 발행되어 배포되자 그 영향으로 이와 유사한 지하신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널리 유포되었다. 당진에서 경성제일고보로 유학갔던 순성 출신의 강선필도 지하신문 제작에 자금을 제공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체포된 바 있다. 이런 지하신문 발행은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촉발시키고자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신문의 내용도 이에 부합하게 제작되어 일제 강점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을 본 민중은 크게 고무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촉발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따라서 일제는 이런 지하신문이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을 철저히 검거하여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이종린도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이종린이 위반했다는 보안법과 출판법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만든 악법 중의 악법이다. 보안법은 1907년 7월24일 일제에 저항하는 어떤 집회나 시위도 할 수 없도록 탄압하기 위해 구한국 정부를 압박해 만든 악법으로 광복 이후 미군정을 거쳐 지금까지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악법이다. 출판법 역시 1909년 2월23일 만들어진 법으로 출판물의 원고를 사전 검열하고 배일출판물을 압수할 수 있게 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출판물 제작을 금지하기 위해 만든 악법이다. 일제강점기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탄압받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수감한 서대문형무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수감한 서대문형무소

일제는 『조선독립신문』이 이종린이 주도로 발행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발행인인 윤익선을 주범으로 보고 수사하였지만 윤익선은 몇 일을 버티지 못하고 형식상 발행인이었음을 인정하였고, 모든 것이 이종린이 기획하여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제호는 물론이고, 신문에 들어가는 연호도 일본 연호인 대정(大正)이 아닌 조선의 건국(建國)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독립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종린의 분명한 의지를 엿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종린은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종린이 받은 3년형은 3.1혁명을 주도하였다고 하는 33인의 민족대표 중에서도 손병희와 최린,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한용운만이 언도 받은 최고형으로 일제의 입장에서 이종린이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배포한 행위를 얼마나 위험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수감한 서대문형무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수감한 서대문형무소

이종린은 1921년 만기 출소 이후에도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언론인으로써 역할과 천도교도로써 종교적 역할을 통한 독립운동이었다. 언론인으로써 이종린은 1921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천도교회월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종린은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를 통해 단순히 종교적 교리 전파의 수준에 국한하지 않고 학술적인 기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중을 계몽하여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1924년에는 오늘날 전국기자대회에 해당하는 언론집회압박탄핵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언론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1922년에는 재외조선인출총노동자조사회의를 결성하여 위원이 되었고, 1923년 1월에는 유진태, 백관수 등 20여 개 단체의 대표 160여 명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고 3회 연속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항거하였다. 또한 1922년 11월 민족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과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민립대학운동을 주도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경성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하던 민중계몽운동에 관여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 간의 민족유일당인 신간회 창립에 앞장서 천도교 구파를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선전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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