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아름숲 기자단] 10월은 우리 역사 속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시작으로 한글날이 이어지고, 독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독도의 날이 있습니다. 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도 10월입니다. 가을바람에 싱숭생숭한 10월. 아름숲기자단의 기사와 함께 우리 역사 속 그날들을 되짚어보는 시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한글에 이런 뜻이?!

정성지 기자(당진중 1학년) james2081@naver.com
정성지 기자(당진중 1학년) james2081@naver.com

이번 여름방학에 서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이탈리아의 어느 거리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글자! 유럽 사람들의 옷에 한글이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 사람들은 한글이 예쁘다고 생각한다니 그럴 만하다. 그때 난 어떤 점 때문에 한글이 예쁘다고 생각할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한글에 대해 아는 걸 떠올려 보았다.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였다.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한글의 위대한 점을 알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첫 번째, 한글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밝혀진 글자다.

두 번째, 한글은 배우기 쉬운 언어다. 대졸 정도의 학력이면 1시간 안에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세 번째, 발성기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다. 예를 들면 ㅇ 발음을 할 때 입술 모양도 ㅇ 모양이 되기 때문에 많은 언어학자가 감탄한다고 한다.

네 번째, 모음 부분이 굉장히 쉽다. ㅣ, ㅡ, ㆍ 으로 모든 모음을 말하고 쓸 수 있다. 심지어 각각 사람, 땅, 하늘의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

다섯 번째, 한글은 자판을 칠 때도 굉장히 편리하다. 천지인 키보드를 보면 ㄱ,ㄴ.....ㅎ 와 ㅣ,ㅡ,ㆍ만 있으면 모든 글자를 칠 수 있다. 이런 글자를 다 넣고도 여유 공간이 남는다. 이웃나라 중국에서 쓰는 글자를 생각해보자. 중국어를 치고 싶을 때 먼저, 한자와 성조 둘 다 알아야 하고 입력 방법도 간단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한글의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기 때문이다. 전형필이라는 분이 아주 비싼 값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샀고 피난을 갈 때도 훈민정음 해례본만 챙겨 떠났을 정도로 귀하게 전해졌다. 이 훈민정음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우리의 글, 한글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전해져온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예를 들어 카페 이름, 기업의 상표가 대개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 또한 생일파티, 생일잔치 중 생일파티라고 더 많이 사용한다. 비속어와 은어, 줄임말 사용은 비일비재하다.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 싸해짐>과 <존맛탱: 존맛(매우 맛있는)에 강조하는 의미로 탱을 붙인 단어>이다. 어른들은 줄임말 공부를 해야 알아들을 정도다. 과연 이대로 좋을까. 한글날이 의미를 한번쯤은 알고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도가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독도에 대한 역사와 일본의 억지 주장에 대해

이윤태 기자(원당중1)
이윤태 기자(원당중1)

우리는 독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부분 우리 땅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근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근거는 무엇이고, 일본은 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까?

먼저, 일본은 왜 우리나라의 독도를 뺏으려고 하는지 독도의 장점들을 알아보자.

첫 번째, 독도에는 엄청난 양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몇 십 년 전에 독도에서 메탄 하이드레이트라는 지하자원이 발견 되었다. 이 메탄 하이드레이트라는 지하자원은 당장 개발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효율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자원으로 손꼽힌다. 만약 우리가 이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수출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영토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만약 일본이 독도를 소유하게 된다면 일본부터 독도까지의 바다가 모두 일본의 것이 된다. 그 바다에서 어업을 하든 자원을 개발하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 연구를 하기에 좋다. 독도는 굉장히 깨끗한 청정 지역이기 때문에 독도에 사는 여러 희귀한 생물들이 많다. 미발견 생물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고 다양한 성과로 위상을 높일 수도 있는 문제다.

과연 독도는 우리 역사 속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일본의 억지주장은 무엇일까? 먼저 역사를 들여다보자.

-512년: 신라에 의해 정복되면서 신라의 소유가 되었고, 우산도라고 처음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1454년: 우리나라에 독도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
-1625년: 일본이 울릉도에 대한 도해(건너감)를 면허했다.(허락했다)
-1693~1696년: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이 울릉도에서 어업을 하다 납치당하고 그 후 일본에게서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문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1625년의 도해 면허를 금지 했다.
-1870~1877년: 일본이 여러 번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증명했다.
-1900년: 고종황제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1905년: 일본이 독도가 무주지(주인이 없음)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네 땅이라 주장했다. 물론 그 뒤로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이 여러 번 증명되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1600년대에 일본의 어부들이 전부터 독도에서 어업을 했다는 것인데 이는 1693~1696년의 안용복 사건으로 우리나라의 영토인 것이 증명되었고 일본의 도해 금지령까지 내렸기 때문에 이 근거는 억지 주장이다.

두 번째로는 1905년의 시마네현의 발표다. 하지만 시마네현의 발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영토로 인정했던 역사를 무시하고 일본이 억지로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근거로 적합하지 않다.

세 번째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의 섬 세 개 외에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를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으나 이는 억지주장이다. 일본의 주장대로 생각해보면 조약에 명시된 3개의 섬만 돌려주고 우리나라의 3000여개 섬은 일본이 가져가야 한다.

이상으로 왜 독도가 우리땅인지, 일본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짚어보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앞으로도 독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한다. 긴긴 역사 속에서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엿보는 일본의 행태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평화주의자 안중근의 10월 26일

강준영 기자(계성초 5)
강준영 기자(계성초6)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최후의 유언 중에서-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다. 이 사건으로 침체 됐던 항일의병이 다시 일어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평화주의자였다. 죽기 직전 마지막 유언으로 “동양평화”를 외치고 싶어 했던 일화를 통해 그가 그리던 세상을 알 수 있다. 전쟁의 위협이 없고 모든 국가와 국민이 평등하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안중근 의사는 고대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에 포군이 있어 사냥을 따라 가고, 총을 쏘고, 직접 사냥을 했었다. 그를 보고 김구 선생은 ‘총 잘 쏘는 청년’이라 말했다. 그런 그가 1908년 중국의 지린성 훈춘시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석 달 간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미 실력으로 준비된 사람이었다.

일본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테러리스트가 아닌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정의를 위하여(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 조항)

두 번째 불특정 다수가 아니었다. (대상이 확실 했다.오직 이토히로부미 였다.)

세 번째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네 번째 군인의 신분으로 의롭게 행동했다. (대한의군참모중장)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 같은 경우는 숨어서 했지만, 안중근 의사는 나서서 내가 했다고 하면서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개인이 아닌 국제법으로 다뤄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대한의군참모중장 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시기에 동양의 평화론을 쓰고 있었다. 이것을 완성할 수 있게 조금만 늦춰 달라고 했는데 일본을 자기들의 잘못을 뒤엎으려고 사형을 시켰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일본인 간수 조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뤼순 감옥 에서 ‘안중근 자서전’을 만들었다.

그 책 속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가 기재되어 있다. 시간이 흘러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죄목을 기록했던 것이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고종황제를 폐위 시킨 죄.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한 죄.
-철도, 광산, 산림, 동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킨 죄.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 시킨 죄.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 태워 버린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쉬지 않다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대륙침략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 대 황제를 죽인 죄.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 이었던 이토는 최종 결정권자로서 우리나라를 짓밟는데 깊숙이 관여했다. 이토의 죽음은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날의 저격은 벼랑 끝에 몰린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독립투사 안중근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멘토이며, 롤모델이었던 의사 안중근. 그의 생애는 짧았으나, 국가와 민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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