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만의 ‘눈물의 상봉’

▲ 밖에서 이별을 고하며 뜨겁게 포옹을 나누던 이들 형제. 인터뷰 내내 처음으로 김순학 씨가 그의 감정을 드러내고 울음을 터뜨렸다.

합덕읍 대합덕리에서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고아원에서 헤어진 두형제가 48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것이다.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이들 형제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중,
형인 김순철(58)씨가 동생 김순학(54)씨에게 “돈을 벌어 꼭 데리러오겠다”며
고아원을 나간 뒤로 48년 동안 서로 생사도 모른 채 지내게 됐다.


1년 후 형을 찾기 위해 역시 고아원을 뛰쳐나온 동생 김순학 씨.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탓에 하루하루 근근히 끼니를 때우며 전국을 떠돌던 김순학 씨는
25년 전 당진군 합덕읍에 도착, 정상영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정착했다.


그러던 중 최근 동생 김순학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당진군청 주민생활지원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0여년 전 방송을 통해서도 찾을 수 없었던 형제가 극적으로 상봉한 것이다.
정윤성 기자 psychojys@hanmail.net


▲ 형 김순철 씨가 48년만에 만난 동생 김순학 씨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있다.
“미안하다 동생아”

48년만에 극적으로 동생을 찾게 된 김순철 씨는 연신 동생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현재 경기도 강화에서 지내고 있는 김순철 씨는 동생을 두고 고아원을 나간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었다.


“제가 14살, 동생이 10살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들도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어린나이에 아무것도 없었던 저희 형제는 어쩔 수 없이 고아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아원은 요즘과 달라서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폭력과 학대에 무방비로 노출돼있던 때죠”라며 말을 이어갔다.


“오기가 생겨버린 저는 고아원을 나가 꼭 저희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나중에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더군요. 30여년 만에 드디어 서울 여의도에 식당을 차리게 된 저는 당시 손님으로 친분을 쌓았던 방송국 관계자들을 통해 동생을 찾는다는 방송을 수차례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어요. 그 후 18년 동안 저는 거의 포기 상태로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형 찾아 전국 떠돌이

극적으로 동생을 찾아 눈시울을 붉히던 형과 달리 동생 김순학 씨는 내내 어색해하며 아무말이 없었다.
사실 김순학 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글을 쓸 줄은 커녕 읽을 줄도 모르는 상태. 48년 중 23년여 동안을 전국을 떠돌며 염전, 공장 등 일용직을 전전, 더욱이 대부분 폭력을 동반한 임금 착취를 당한 탓에 그는 현재 심한 대인기피증도 가지고 있었다.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를 대신해 5년 동안 그를 돌봐주고 있는 정상영 씨가 입을 열었다.


“김순학 씨가 합덕읍에 온 것이 한 25년전 쯤인 것 같습니다. 그를 가엽게 여긴 마을주민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돌봐주다가 한 5년전부터 저희집에 머무르게 됐어요. 그 후 그에게 지원을 받게 해주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법원에서 분명히 호적이 있을 거라며 이를 거부해 무적자 아닌 무적자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에 드디어 당진군에 거주지를 둔 유적자가 됐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최근 그가 형이 있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저는 군 주민생활지원과에 연락, 그의 고향인 여주를 직접 찾아가 자료를 확인해 그의 형이 강화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그렇게 이들 형제가 상봉하게 된 것입니다”


▲ 짧은 재회 후 다시 찾아온 이별. 함께 살 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그러나 눈물의 바다가 펼쳐진 이들 형제의 48년만의 재회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형인 김순철 씨는 여의도에서 잘나가던 식당을 경영했으나 IMF에 휘말려 사업이 실패하고 빚만 잔뜩 안고 도망치듯 떠나와 강화에 머무르게 된 것. 이렇다 할 거주지도 없는 상태로 혼자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이들의 만남은 감동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장면이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동생 김순학 씨는 “형 따라 같이 살고 싶어”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요. 형이랑 같이 가면 안돼요?”라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는 김순학 씨.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 김순철 씨는 “그래 형이랑 같이 가자. 같이 살자”라고 대답하며 또 다시 서러운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현재의 이들은 서로에게 행복보다는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 주위의 만류와 설득으로 이들은 좀 더 나은 환경과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잠시 동안 다시 한 번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이들 형제의 48년만의 상봉에 큰 도움을 줬던 주민생활지원과 박우학 팀장은 “이런 안타까운 사연을 가슴속에 품고 계신 분들이 당진군에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며 “이번 만남을 통해 당진군민뿐 아니라, 전국에 계신 이산가족들에게도 큰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또, 이들 형제에 대해 박 팀장은 “48년 만에 재회한 이들 형제들이 짧은 만남을 가진 후에 또 다시 겪게 되는 이별이 너무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인 것 같다”며 “군차원에서도 이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48년이라는 긴 세월을 헤어져 있던 이들 형제. 그에 비해 이들의 만남은 단 몇시간. 서럽고도 어쉬운 짧은 만남이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삶의 희망이 생겼다는 형 김순철 씨.


“동생을 위해서, 그동안 낭비했던 48년이라는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온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서 꼭 더 이상은 동생과 헤어지지 않고 같이 죽을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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