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당진신문=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자기 소개서’에 ‘자기 자신’은 없습니다!

자기를 소개한다는 것, 특히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어서 자기를 내보인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는 듯합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를 온전히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기를 소개한다는 것처럼 난감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역사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기’를 소개한다고 볼 수 있는가와는 별개인 까닭입니다.

개인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도 중첩이 되기도 하여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개인사를 가볍게 다루고 지나갈 수도 있으나, 그 역사를 읽는 주체는 또 다른 자기(타자, alter ego)의 방식대로 읽습니다. 여기서 자기 소개서 혹은 이력서에 대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기 소개서라고 말하기 보다 타자가 원하는 방식의 역사를 엮어달라는 주문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소개는 스스로의 평가가 담긴 사건들을 나열하지만, 그것을 받아 든 주체는 실제의 나 자신의 역사를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와 타자가 나에게서 요구하는 역사와의 차이점이 발생할 때, 개별 존재의 독자적인 해석과 사건의 특이성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는, 다시 말해서 고용주가 이어가고 싶은 역사는 자기 소개서를 내미는 사람과 일치될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용주의 역사 의지에 자기 소개서라는 양식과 내용은 진정한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각색된 역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의 뜻의 역사가 존중받는 세계를 위하여! 

함석헌의 역사관을 빌려서 말하자면, 삶은 주관적 삶(개별적 인생)과 객관적 사실(事實, 보편적 역사)의 변증법적 삶이어야 합니다. 이 때 삶은 늘 새로워야 합니다. 인간이 권태와 피로가 누적되는 삶으로 인해서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 사람, 삶이 다 어원이 같다는 것은 상식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삶이란 ‘살다’라는 동사처럼(영어의 love나 live처럼)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썩지 않습니다. 역사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 앞에서 신의 의식을 갖는 단독자가 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이 뜻이라는 형이상학을 추구하다가 언젠가 그 뜻의 보편성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와 거리, 주체와 주체, 나라와 나라 사이의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이 없이 새로운 인간 혹은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은 전적으로 이해이고 이성적 삶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입니다. 삶의 쳇바퀴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삶이 새로워지면 사람도 정체되지 않고 흘러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시간과 시간, 역사와 역사의 존중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삶이 동사적 명사가 된 것이 신비입니다. 삶은 그렇게 머문 것 같지만 머물지 않은 듯 흘러갑니다. 새로운 시간과 역사를 향해서 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삶이 새롭지 않다면 개인의 이력서에 나타난 시간도 일본이나 한국의 역사도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삶에 대한 성찰이 없는 인간이 새로운 것(사물성, 즉물성)을 찾아나가리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미국도 개별적 인간이나 개별적 나라의 고유한 시간에서 파생된 삶을 말살합니다.

앞에서 말한 새로움[新/親]은 곧 사-이(zwischen)이고 살림인데, 그것은 주체와 주체의 시간을 사랑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친밀한 시간의 존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합니다. 살림의 역사이자 새로운 시간의 역사, 씨알의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자기’에 대한 이해, 곧, 이성적 삶이 아닐까요? 사실(事實, 史實, 私實)도 가려지고 파악하기 어렵다면 살림은 사실(死實)이 됩니다. 열매 없이 죽고 맙니다. 개인의 시공간적 삶이 황폐되고, 역사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살림이 아니라 죽임/죽음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서 살고 있지 못하고 자기의 주체적 삶의 태도와 판단, 그리고 행동에 따라서 살지 못하는 것은 ‘절대 자유’의 부재입니다. 삶의 원천, 혹은 삶의 시작(arche)이 주체와 밀접하게 맞닿아(an) 있어야 강제나 강압, 구속과 억압이 없는 절대 자유의 흐름이 지속되는 삶의 시간(an-archie)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 시간과 역사를 강요하는 시대착오적(ana-chronic; anachronism) 삶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않는 것은 개인적 시간의 절망이요, 역사적 좌절입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말하고 있듯이 절망은 죄입니다. 뜻의 형이상학과 개인의 뜻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씨알 고유의 삶의 역사를 창조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은 없습니다. 주체도 없이 떠밀려가는 세인(世人 혹은 일상인, das Man)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사회, 조직, 자본, 관료는 주체적 뜻의 시간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뜻, 곧 결코 형이상학적 뜻이 아닌 다만 현실적인 뜻, 과망(過望)의 뜻만 원합니다. 주체의 시간은 객체의 뜻에 편입시키려고 강제할 뿐입니다. 객체는 주체의 뜻으로 들어가 이해하려 들지(inter-ducere)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뜻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전체주의에 편승하는 의지만 존재합니다.

나는 나의 사실(factum, fact)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곳의 사실(factorium, factory)에 의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성서는 말합니다.

“Verbum caro factum est”(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원초적이고 순수한 뜻은 사실 그 자체입니다. 시초의 발생 장소는 순수한 뜻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자괴감이 듭니다. 찍어낸 역사와 시간이라니요. 자기 소개서에 들어가는 짤막한 개별적 존재의 역사, 그리고 일본의 얼토당토 않은 보편 역사의 왜곡. 우리는 어느 개인 혹은 어느 나라의 시간과 역사의 척도에 의해서 자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개인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나, 개별 나라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나 범주는 다르다고는 할 수 있으나, 성격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기우일까요?

19세기 초반의 서구 유럽문인들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비판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는 그 모습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철도에 의해서 공간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돈만 충분하다면 시간마저도 정중하게 죽여 버릴 텐데!”(Durch die Eisenbahn wird der Raum getodtet, und es beibt uns nur noch die Zeit ubrig. Hatten wir nur Geld genug, um auch letztere anstandig zu todten!) 그 시간의 죽음이 지금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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