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아름숲 기자단] 아름숲기자단이 심훈 선생을 2019년으로 소환했다. 최근 악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부터 영화, 스포츠 등 문화분야까지... 아름숲 기자단이 심훈 선생에게 전하는 다양한 현재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강한 나라로 발전할 우리나라를 지켜봐주세요

송혜주 기자(원당중1)
송혜주 기자(원당중1)

선생님의 일생을 조사하면서 참 다방면으로 재능도 많으시고 또 많은 활동을 하셨구나 알게 되었고 존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너무 젊으신 나이에 생을 마감하셔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게 되었어요. 너무 기쁘시죠? 9년만 더 사셨어도 광복의 순간을 함께 하셨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이후 미국과 소련의 의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눈 38선이 생겼고,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일어났어요. 1953년 휴전 협정을 한 상태로 아직도 종전되지 않고 있어요.

6.25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한반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1차 남북정상회담,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1,2,3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어요. 주위 어른들께서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나중에 사회책에 나올 거라고 하셨어요. 저도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보면서 하루빨리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왕래하며, 기차타고 유럽여행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는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보다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첫 번째 독도 영토권주장 문제예요. 일본은 몇 십 년 전부터 끊임없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대응하지 않고 무시해왔는데 최근에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이제는 독도가 우리 땅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독도가 우리 땅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두 번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예요. 1991년 8월 14일 일본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통해 끔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그 일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어요. 240명이나 되는 증인들이 점점 줄어 현재 20명만 살아 계신대요. 2017년 12월에 우리나라 정부는 민간 기념일이었던 ‘세계 위안부 기림일’을 국가 기념일로 변경하였고 올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두 번째를 맞이하는 해예요.  

세 번째 수출규제 문제예요. 일본이 수출규제를 통해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어요. 이유는 무슨 군사용품을 북한에 빼돌린다,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안들이 많았지만, 일본 아베의 목적은 ‘개헌’이라고 해요. 무슨 개헌이냐면 일본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하여금 방위군 말고 군대를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헌법을 실시하여 일본은 자위대 뿐 정식 군대가 없어요. 개헌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참의원선거에서 과반 수 이상을 얻어야 한데요.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기 위한 행보라고 보시면 되요.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분들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는 우리에게 수출규제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이 모든 일들은 순리대로 풀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강한 나라로 발전할 우리나라를 지켜봐주세요.


[인터뷰] 우리 가슴 속에 심훈을 만나다.

이윤태 기자(원당중1)
이윤태 기자(원당중1)

독자 여러분, 혹시 심훈을 아시나요? 심훈은 그날이 오면, 상록수 와 같은 시, 소설 등을 써서 독립 운동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번에 심훈 작가님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 70년 만에 재발간 되었는데요. 이를 기념하면서 당진에서 수십 년 째 이어져 오는 심훈 상록문화재를 맞아 심훈 작가님과 가상 인터뷰를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Q. 심훈 작가님, 당시 출판되지 못했던 시집이 2019년 현재 작가님의 형에 의해서 출판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작가님의 시집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심 훈 : 그 때는 제가 쓴 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에 대한 사상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해서 정말 화가 나고 속상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저의 시집이 출판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기쁩니다.

Q. 당시 대한민국은 굉장히 약한 국가였을텐데 이렇게 발전한 대한민국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심 훈 : 그 때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해서 많은 나라들에게 치이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전보다는 훨씬 발전한 나라가 되어서 뿌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도 국력이 강하지는 않아서 많은 나라들에게 피해를 받고 사는 것 때문에 속상한 마음도 있습니다.

Q. 혹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가로서 전해줄 말씀이 있으신가요?

심 훈 : 여러분, 앞으로 우리나라를 더욱 발전시켜서 다른 나라의 간섭도, 영향을 받지 않는 강건한 나라를 만들어 주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심훈 작가님의 기대에 부응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심훈 선생의 감독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심훈 선생의 감독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심훈 선생님에게 전하는 우리 영화 소식

송주희 기자(원당초4)
송주희 기자(원당초4)

제가 부곡리에 있는 심훈기념관에 다녀왔는데요. 선생님이 영화에도 관심이 많으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1927년에 일본 유학을 가서 영화 수업을 받고 그 뒤 <먼동이 틀 때>라는 작품을 만드셨다는 것도요. 그래서 선생님께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 칸영화제에서 한국 최초 황금 종려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인데요. “기생충” 영화를 본 영화인들이 8분 동안 서서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해요. 사람들과 부모님은 그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15세 관람가 영화라서 11세인 저는 “기생충” 영화를 볼 수 없었죠.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영화계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궁금하시죠!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전쟁을 벌였어요. 그래서 한동안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했어요. 50년대 이후부터 1년에 100편 가까이 영화를 찍으면서 엄청난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60년대에는 정부가 영화법이라는 걸 만들고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힘든 시기에, 할리우드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만들어졌어요. 2000년대 후부터 한국영화는 전 세계에 주목을 받아요. 현재 세계 3대 영화제로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칸영화제가 있는데요. 2010년 <시>가 칸영화제 각본상을,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대상 황금 사자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올해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대상인 황금 종려상을 받았어요.

이 정도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보이시죠? 저는 <기생충>이란 작품은 보지 못했지만 <엑시트>라는 영화를 보았는데요. 재미도 있으면서 살짝 슬프기도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엑시트>라는 영화와 <기생충>이라는 두 작품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심훈의 시 '야구'
심훈의 시 '야구'

대한민국이 스포츠 강국이 됐어요

강준영 기자(계성초6)
강준영 기자(계성초6)

며칠 전 처음으로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을 둘러봤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야구라는 작품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선생님의 증손 심천보 님께서 대전 한화이글스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모습도 사진으로 만났습니다. 저도 한화이글스팬이라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를 보고 심훈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고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토록 고대하시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올해가 독립한지 74년이 되었습니다. 독립만 되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이 1950년 6월 25일에 남북으로 나뉜 채 전쟁을 치렀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지금은 선진국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스포츠를 좋아하셔서, 운동경기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원동력으로 바라본 민족주의자라고 하시는데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선각자셨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2위), 1988년 서울올림픽(4위), 2002년 한일 월드컵(4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7위)까지 스포츠로 대회도 많이 개최 하고 있습니다. 2032년 남북올림픽도 예정인데, 꼭 통일이 되어 성공적으로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지요. 또한 어린이를 비롯한 청소년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태권도학원을 다녔을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외국에서도 태권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축구도 외국과 경기를 할 때 마다 온 국민이 붉은악마가 되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쳐 댑니다.

특히, 일본과 경기할 때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양궁도 세계대회만 나가면 금메달을 땁니다. “도대체 한국 양궁은 왜 이렇게 강한 겁니까?”라고 외국 기자들이 묻는 답니다. 역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DNA가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종목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피겨스케이팅선수 김연아,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구선수 박찬호, 박찬호 선수는 개인 통산 123승 97패를 기록하고 2005년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 상도 받으면서 기록을 경신하는 위업을 세웠습니다.

박태환 선수는 대한민국 수영 역사상 최초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금메달과  2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박지성 선수는 2003년에 네덜란드 프로축구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하고 2005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박세리 선수는 미국여자프로골프에서 활약했는데, 1996년 IMF 당시 우리 국민의 스트레스를 날려주었습니다. 그 후 LPGA에서 한국 여자 골프는 13번이나 우승을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답니다. 요즘은 축구에 손흥민, 배구에 김연경 선수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저도 운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심훈 선생님께서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스포츠로 민족이 하나 되기를 바랐던 것을 계기로 지금 저희가 다양한 스포츠 경기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면적으로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하나 되는 힘과 패기, 지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하다고 확신합니다. 심훈 선생님! 우리 대한민국이 스포츠를 통하여 더욱 더  위상을 높여 나갈 수 있도록 늘 응원해 주세요.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