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인화 지리학박사,내포민속문화연구소장

역사 간직한 당진읍성 활용하기...당진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되돌려 줘야 할 때

서문 2길 19-60번지에서 발견된 성돌들
서문 2길 19-60번지에서 발견된 성돌들

[당진신문]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아니 당진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도 당진원도심이 당진읍성과 관아들이 있었던 고풍스런 도시라고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당진은 군사행정의 도시, 내포의 중심 서해 관문의 도시였다. 1914년 군현리통폐합으로 당진군청이 들어서고 일본인들이 훼손했던 당진읍성의 성곽과 관아, 그리고 아담하게 자리잡았던 우리 문화유산의 보고였다.

얼마 전 국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옛 군청을 헐어내고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어 광장을 만들 계획이라는 내용과 당진시청에서 학술세미나까지 개최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 필자는 원도심을 개발하기에 앞서 이것만은 꼭 생각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역사문화 기록, 당시의 도로망, 그리고 외국의 옛 문화 복원 시민운동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진의 역사를 간직한 원도심, 당진읍성
당진원도심은 당진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성인 아후산성이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져 조선 세종 9년에 당진읍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성안에는 여러 관아와 그 앞으로 옛 도로망이 펼쳐졌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에 일본은 읍성철폐령을 내혔다. 그리고 1914년 당진군과 면천군을 통폐합하며 동헌(東軒), 군고(軍庫), 통인청(通引廳), 고창방(敲唱房), 작청(作廳), 형청(刑廳), 사령청(使令廳), 빈청(賓廳), 내삼문, 외삼문, 사창(司倉)등의 관아들을 철거시켰다, 이후  당진군청사가 지어졌지만, 옛 성곽문화, 시장문화는 차례로 사라진 뒤였다.

그동안 당진은 개발이 우선시 되고 역사문화 발굴관리를 등한시한 단면이 당진원도심에 있는 당진읍성이다. 무분별하고 급격한 개발, 그것이 불러온 결과물로 일제강점기 나라 빼앗긴 설움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현존하는 당진읍성 성곽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북벽은 당진농협중앙회 당진지부 뒤편에서 동벽(東壁)으로 연결돼 있으며 옛 당진군청 자리 부근에서 남벽으로 연결되어 옛 당진경찰서 자리에서 서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당진중앙1,2로 부분까지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시가지 조성으로 그 형적은 찾을 수 없다.

당진시가지 발달과정과 옛 도시의 정취를 담은 관로
당진 도심의 옛 정취는 상실했지만 당진읍성을 중심으로 당진시가지가 발달해온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도시재생사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헌에 해당하는 구군청
동헌에 해당하는 구군청
당진교회 성심관(왼)
당진교회 성심관(왼)
거북여관을 지을 당시, 땅에 묻혀있는 거북돌을 발견해 거북여관 앞에 놓았다. 비신을 받치는 거북돌 외에는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발견되지 않아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거북여관을 지을 당시, 땅에 묻혀있는 거북돌을 발견해 거북여관 앞에 놓았다. 비신을 받치는 거북돌 외에는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발견되지 않아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먼저 당진 옛 정취는 당진현청 주변이다. 현청을 중심으로 동헌, 외삼문을 나서면 거북여관이 있던 골목으로 나오는 곳에 남문이 있었다. 이곳에서 옛 당진교육청(오거리), 당진우체국, 당진보통학교, 당진향교로 가는 길이 있었고, 남문을 나와 당진열쇠 골목으로 해서 당진4교(당진보건소 주변), 옛 대덕리마을회관 앞을 지나면 면천군가는 길과 용연리 흥세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용연리에서 청산치를 넘어 해미로 가는 길이 있었다.

서문로는 당진 제1교 다리 즈음에 있던 서문을 나서서 탑동초등학교를 지나 당진북창(우두리)로, 그리고 진관이 있던 채운교를 거쳐 영랑사로 가는 길이 있었다. 동문로는 당진현청에서 나와 동문을 지나 북문리로 가는 길과 옛 당진면사무소를 지나 밤절고개로 해서 기지시로 갈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70년대 장규순 당진군수시절 당진신시장과 북부대로, 남산공원을 새로 개발해 당진도심이 확장되고 32호선 외곽도로가 정비되어 당진 도심 확장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3차 변화는 1990년대 민종기 군수시절 당진청사, 당진경찰서, 당진터미널이 이전하면서 계성초 주변에 아파트들이 건립되고, 터미널, 원당동 등으로 확대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2000년대 당진문예의전당 건립과 무수동 개발, 대덕리 먹자골목 개발, 우두동 개발로 또 한 차례 변화를 가져왔다.

2010년대 들어 당진교육지원청 이전, 대덕리 필하우스, 수청지구 개발 등으로 당진 시가지가 크게 발전하고 있다.

당진읍성, 당진원도심을 당진시민들의 문화 관광 공간으로
당진읍성과 당진 옛 도로는 당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문화자원으로 당진원도심의 심볼이다. 당진읍성 성돌들, 객사, 외삼문, 내삼문, 동헌 등 관아들, 그리고 동문 앞쪽에 있던 옛날 당진면사무소, 당진금융조합, 남문 앞에 있던 당진교육청, 서문 앞쪽에 있던 사직단, 북쪽 산성에 있던 여단 등은 당진시가지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당진읍성 뒷산은 당진시내경관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이 공간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친 도시생활을 편안하게 휴식하고 즐기는 역사문화 공간이어야 한다. 읍성의 유래도 배우며 건강, 시가지를 구경하는 문화시민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옛 도로망 복원 등으로 옛 정취 느낄 수 있게 만들 수 도 있다. 당진이 역사문화도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도록 표지석도 세우고, 도시발달에 따라 당진원도심이 살아날 수 있도록 도로망과 더불어 옛 건물들도 복원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원도심에는 다양한 민속 문화가 살아 있다. 옛 도심의 확산과정에서 오는 당진읍장, 우시장, 당진군청의 앞 터미널, 주점, 각종 점포의 발달 등도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충분한 검토와 더불어 당진도시재생사업이 이루어진다면 옛 당진읍성과 관아, 그리고 그 옛 도시 모습이 살아나 당진시 도시정책에 충분히 반영될 것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아는 당진시민들은 정말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울러 당진시민들에게 문화공간, 경관 조망권, 휴식권도 보장해 주고 원도심 상인들은 관광수익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작은 문화예술공간 조성부터 원도심의 가치 높여나가기
문화는 대중과의 자유로운 접촉이 가능해야 고양된다. 과거와 만나 창조와 향유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시민들이 문화를 향유하고 분출할 거점으로 원도심을 구성해 나가자는 것이다. 어느 지자체든 문화도시를 지향하지 않는 데는 없다.

미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는 문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고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곳, 옛 건물에 문화예술인이 작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작은 카페들이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는 작은 박물관(기념관, 전시관)도 조성하고, 전통공연장도 조성하면 어떨까. 그리고 유·무형 문화유산도 발굴하고, 흥미있게 활용할 계획도 세워보았으면 좋겠다.

시민들의 힘을 모아 문화공간화 하자
문화에 불모지나 다름없는 당진에 당진읍성은 참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시민들이 동참하는 우리문화 보존, 당진읍성 갖기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고성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고을 성주되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국가에서 다하지 못하는 문화재 복원에 시민들이 나서서 조사도 하고 펀드도 조성해 고성을 복원하고 있다. 당진시민들도 우리전통과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있다.

누군가 나서서 당진시민들과 함께 당진읍성 발굴, 복원, 문화공간을 만드는데 모금도 하고 복원 정책 등에 참여해 내 고장 문화유산을 갖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당진원도심도 문화시민,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살아날 것이고 문화공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