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철학박사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철학박사

[당진신문=김문헌]

일상이 촘촘히 엮인 역사는 늘 그렇듯 또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삶이 시간과 공간의 얼개로 형성되듯이, 죽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요즘 회자되는 ‘웰다잉의 문화’라는 그럴듯한 언어로 죽음을 미화하지만, 과거 어느 시공간에서 죽어간 주검은 아예 기억조차 되지 않는다.

다수의 삶과 그 다수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지배자의 일상적/비일상적 시공간적인 사건과 그 위대한(?) 기억만이 추념될 뿐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땅은 그와 같은 시간과 사건, 그리고 일상을 살아왔던 사람들을 달리 기억한다. 땅이 품고 있는 기억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땅은 특정한 시간과 일상을 살아갔던 특수한 사람들만 기억한다. 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한 삶-터가 아니다. 죽음을 지켜내야 하는 생존의 공간이기에 더 그러하다.

한자 문화권에서 ‘국가’(國家)라고 칭하는 관념은 자신의 땅과 타자가 속한 땅의 경계를 가르며 울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전쟁의 산물임을 증명해주고 있다(口+戈). 추측컨대 동양에서 나라는 나의 근원(애초에 나 주체성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인 가족(남자의 씨족문화의 산물)의 연장, 곧 국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족은 종족과 혈족, 그리고 동족과 민족이 되어 국가라는 추상적 집단의식을 갖게 한다. 그런데 가족의 외연의 확장인 국가에는 수많은 종족과 민족의 결이 결합된 산물이 아니던가. 땅은 그 이질적인 동질성을 확인하는 각축장, 이익 관심의 근간이 된다. 이 때 땅은 더 이상 삶과 생명을 품지 못한다. 땅은 주검이 넘쳐 나는 살인과 전쟁의 공간으로 전락한다. 그로인해 주검으로 변한 이들을 떠올려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땅에서 그들의 주검의 해체와 합성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국민, 혹은 시민이 존재할 뿐이다.

공교롭게도 영어의 ‘country’는 라틴어의 ‘맞은편에’(contra), 혹은 ‘마주하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 ‘나라’, ‘조국’, ‘국가’ 등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다. ‘애국자’, 혹은 ‘우국지사’라고 번역되는 ‘patriot’는 어떤가? ‘조국’을 뜻하는 ‘patris’와 ‘~주민’이라는 뜻의 ‘ot’가 합성된 말로써 ‘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아버지’라는 어원을 가진 ‘patri’ 혹은 ‘pater’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국가나 조국이라고 할 때, 그 실체와 관념은 가족의 연장선상에서 아버지와도 같은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가부장적 개념이다.

함석헌은 “나라는 땅에 있지 않고, 허공에 있지 않고, 내게 있다... 나라는 민(民)이요, 민은 나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역사가 나이고, 민족이 나이다. 나 주체성의 발견이 먼저다. 개인의 주체성, 즉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있어야 나라가 있고, 역사와 민족이 존재한다. 이는 공동체성의 무화(無化)가 결코 아니다. 역사의 바탈(보편성)이 민중에 있다는 역설이다. 땅과 나라-터는 서로 주체적 존재인 개인의 가슴에 있다. 가슴 속에서 땅은 생명이 되고 정신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을 차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생존 경쟁으로는 세계의 시민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날 수 없다. 생물계의 지배 법칙은 약육강식의 아님을 깨우치고, 전쟁으로는 정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싸우는 대립을 지향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협동하는 대립’의 상호부조, 세계평화, 세계정부를 구상, 구현해야 한다.

소수자라 해서 다수자의 반대라는 단순 이분도식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소수자는 약자를 포함한다. 차라리 소수자는 약자라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강자는 자신들을 소수자라 말한 적이 없다. 어쩌다 자신들을 소수라 칭할 때는 이미 특권계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계급의식을 반영한 것이니 말이다. 이에 반해 약소수자의 정신과 생각만큼은 살아 있는 생명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삶-터를 지킬 수가 있다. 함석헌이 “정신은 본래 혁명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생각은 생명의 깃발”이라 설파한 것처럼, 먼저 생각하는 씨알, 정신을 가지고 사랑의 꿈틀거림을 나누고 실천하는 씨알이 되어야 한다. 울을 넘고 땅을 넘어 정신으로서의 나, 순수의식으로서의 얼을 길어 올려 기르고 땅을 위한 폭력과 전쟁, 살육과 주검이 없도록 씨알은 반항하는 생명, 저항하는 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토, 국민, 가족이기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정신과 의식은 땅이라는 욕망의 유형적, 도구적 존재성을 넘어서 무한한 평화와 울 없는 세계민중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가부장적 대타자(Other)인 국가, 땅에 의존하고 의식을 투사하지 말고 씨알과 씨알이 깨어서 서로 연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적 상호부조의 삶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다시는 이 땅에 또 다른 전쟁과 주검, 수많은 폭력과 살육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키는 방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총칼이라는 무기가 아닌 ‘자본’으로 국경 혹은 경계를 넘어 약소수자 씨알을 유린하는 것을 보면, 상호부조의 생명적 평화는 요원한 것일까? 이참에 국경을 초월한 자본 전쟁에 대한 경각심과 그로인한 고통과 죽음, 지배에 대한 화폐권력과 화폐감각(화폐의 미적 가상, fetishism)을 더 철저하게 주시해야 하리라. 호국의 달 6월.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간/죽어갈 영령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수자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기억을 새롭게 축조한다는 것,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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