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삶도, 고단한 삶도, 고단할지도 모르는 삶, 그 모든 삶 속에서 우리는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 눈이 부시게 소중한 새날이 조용히 밝아온다

이미지=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캡쳐
이미지=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캡쳐

[당진신문=이선우 작가] 자는 시간이 아까워 밤이 늦도록 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을 걱정하며 억지로 잠자리에 들 때가 많다. 그러니 알람 소리를 못 듣거나 들어도 일어나기 힘든 아침. 일찍 일어난 작은 아이가 귓속말로 나를 깨운다. “엄마, 나야” 게슴츠레 겨우 뜬 눈으로 아이와 눈을 맞추고 팔을 뻗어 꼭 안아주면 아이는 그 짧은 팔로 나를 토닥이며 나머지 말을 전한다. “근데 엄마 햇님이 아침이래!”

어렵사리 이불을 밀어내고 식탁에 앉은 큰 아이는 이제 3학년이 된지 한 달이 되어간다. 해 바뀌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방학 내내 자는 시간이 늦어 걱정을 했더니 개학과 동시에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학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무얼 줘도 후루룩 잘 먹는 편이다. 가끔 밥이 놓여있을 땐 미간을 찌푸리며 식탁에 앉는다. 그 못난 표정을 못 본 채 할 때도 있지만 괜히 한 소리 해서 잠깐씩 언짢을 때도 있긴 하다. 본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밥을 안 먹겠다, 어린이집에 안가고 엄마 따라 가겠다 투정부리는 동생을 어르고 달래는 오빠스러운 면모를 뽐내기도 하니 크긴 컸나보다. 

방금 전까지는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엄마를 안아주던 작은 아이는 식탁 앞에서 자주 돌변한다. 누룽지를 끓여주면 누룽지라서 싫다. 밥을 주면 밥이라서 싫다. 까닭도 여러 가지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춰주며 식탁에 앉힌 다음 밥을 오물거리는 작은 아이 옆에서 머리도 묶어주고 옷을 입혀주기도 한다. 물론 치마를 입고 싶은데 바지를 줬다고 울고불고 하거나 오빠처럼 물을 싸달라는 둥 (무거운) 책을 가져가서 친구들과 보고 오겠다는 둥 고집을 부리는 일도 다반사. 그러니 어린이집 통원 버스 시간에 맞추려면 인내심 게이지를 높여야 할 때가 많다. 길어야 한 시간 남짓, 아침 8시 15분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는 월화수목금이 수년째 반복되는 일상. 너무 평범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이 일상이 사실은 눈부시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걸 절절하게 깨닫게 해준 한 편의 드라마를 만났다.

“대단한 날은 아니구.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 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 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 때가.”

아이와 함께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던, 그 평범한 어느 하루가 평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김혜자. 종영하고 나서야 뒤늦게 몰아보며 폭풍 오열, 며칠째 퉁퉁 부은 눈으로 살게 한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 속 한 장면이다. 순식간에 흘러간 한 사람의 인생, 드라마가 그려낸 그 지독히도 평범한 삶은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딸 그리고 나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 모두의 삶이기도 하다. 하루를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1년을 보내며 한 것이 없고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후회하고 한탄하는 지금 이 순간의 평범한 삶이 사실은 어느 한 순간도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그러니 다 괜찮다고 위로해준다. 고단했던 삶도, 고단한 삶도, 고단할지도 모르는 삶 그 모든 삶 속에서 우리는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 눈이 부시게 소중한 새날이 조용히 밝아온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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