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문화유산 파괴하나? 보존하나? (4)
당진의 문화유산 파괴하나? 보존하나? (4)
  • 당진신문
  • 승인 2008.08.25 14:53
  • 호수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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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석 표 / 편집위원장. 당진군문화유적보호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사) 내포문화 연구원 원장


8. 순성면

1) 광천리 유물산포지(散布地) 1·2
광천리 349-1 임야외 66필 및 859전(田)외 139필 원삼국시대 연질(軟質)토기조각이 다수 확인되고 있으며(859 전 田외)에서는 원삼국시대 타날문 토기조각과 연질토기조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2) 백석리 유물 산포지
백석리 산 93 임야외 115필로 청동기시대 밭지역에서 방추차와 연질(軟質)토기조각, 경질(硬質)토기조각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3) 백석리 요지(窯址 - 가마터)
원백석 마을 동쪽 약 600m정도 소재 조선시대 요지로(사기장골·점촌)백자 가마터 추정, 출토 유물은 백자조각이다.

4) 봉소리 선돌(立石)
봉소리 1109 전(田)외 3필, 봉소2리 마을 입구 소재, 청동기시대(약 3000년전~약2400년전) 선돌로 높이 130㎝, 두께 45㎝, 둘레 136㎝ 규모이다.
선돌은 오늘날의 기념비와 같은 것이다.

5) 봉소리 석기 출토지
봉소리 296-4 외 96필, 표고 50m, 능선 평탄한 구릉지 소재 청동기시대 돌칼(石劍)조각과 돌화살촉, 유구석부(홈이 있는 돌도끼)등이 출토되었다.

6) 홍주 북창터
중방리(북창마을) 112외 북창초등학교~신평간 도로 북창교 직전 우측 주변으로 추정함.

7) 시인 윤곤강 묘소
갈산리에 묘소가 있는데 공은 순성면 갈산리와 당진읍 읍내리에서 거주했으므로 그 시비를 규모있게 세우고 기념사업도 전개해야 할 시인이다.


9. 우강면

1) 관음사 돌미륵
송산리 은골 산 70-2 임야소재. 순성면 중방리와 송산리 경계에 있는 수부산(77.8m) 당산암 건물안에 모셔져 있는데 민간기복 신앙형태인 바위돌을 미륵으로 모신 형태.

2) 송산리 유물 산포지(散布地)3
솔뫼성지(김대건 신부 탄생지) 북동쪽 낮은 구릉소재. 청동기시대(약3000년전~약2400년전) 무문토기조각의 출토가 확인되었는데 취락 형성에 적합한 입지이다.


이밖에도 송산리 유물산포지 1 <508-20 전(田)외 145필 원삼국시대 연질토기조각 출토지>, 동 유물산포지 2 <163-39 전(田)외 107필 백제시대 백제토기조각 출토지>, 동 유물산포지4<솔뫼성지 북동쪽 감리교회 주위 구릉지에 연질토기조각 출토지 등이 있다.>

3) 강문 부리포(富里浦)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창조(漕倉條)에 보이는 범근내포(氾斤乃浦)로 지칭하는 문헌도 있으나 필자가 누차 비교 답사 결과 이 포구는 일제강점기 정기여객선 또는 소들강문평야(예당평야)에서 착취한 벼를 일제가 강제반출해 가던 항구였다.


어쨌던 1910년대 부터 1960년대 까지 인천항을 왕래하던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항하던 항구이므로 그 유적의 보존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는 뱃터(선착장)와 옛 건물들이 여러 동(棟)있으므로 잘 보존해야 한다.

4) 원치리 토성
원치리 412 전(田)외 51필(성재 또는 성밀으로 부름) 원재마을 동쪽 구릉소재, 본래 해안성으로서 거의 일직선형 상곽이며 성의 길이 약 1000m이며 성안·성벽 주변에서 토기조각, 어골문 기와조각, 청자조각 등이 출토되며 필자는 수차 현지 답사함.

5) 창리 토성
창리 창말(114대 垈 외 65필) 소재. 우강면 사무소에서 강문리 부리포행 도로 창리 끝부분 우측 소재. 현재 동북쪽 성벽 약 2m 폭 언덕이 30여m 보이나 파괴돼 있다. 조선시대 축조한 성으로 추정되며 필자는 1995년 10월 이후 누차 현장 답사함.

6) 유치흥(兪致興) 불망비(不忘碑)등
5기
우강면 창리 1구 원동에는 유치흥 시혜(施惠)불망비, 영세(永世)불망비 각 1기, 유진태(兪鎭泰) 송덕비 1기, 유한팔(兪漢八) 유허비(遺墟碑)1기 등이 있는데 필자는 2차 답사한바 잘 보존되기를 요망함.


10. 신평면

1) 한원사(韓原祠)와 이만유장군유품 거산1리 도암 510소재. 1899년(광무3) 건립한 이만유장군 사당이며 유품은 지방문화재 제84호로 지정 보존 유의.

2) 문정사(文定祠)
도성리 관절 소재. 홍문관 부재학 이성언(1380~?)의 사우로 필자 2회 현지 답사.

3) 도성리 패총 1, 2
도성리 266-2 전(田)외 4필, 도성리 290대 垈외 7필에 있었던 조개더미 유적.

4) 오봉제
상오리 청금마을 492-11 임야
소재, 1933년 상오리와 송악면 봉교리, 청금리, 신평면 상오리 소재 오봉제 저수지 준공 오봉제수리조합건설기념비로 나옴. 비문은 탁본과 동시 안내문도 세울 것.

5) 신당리 유물상포지 1,2
신당리 산 93-1 임야외 68필. 신당리 개언덕마을에 청동기시대 유물 무문토기편, 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된 곳.

6) 신평현성(운정리 산성)
운정리 산 79-3 임야외 2필 삽교호 옆 백제토성으로 추정되는 산성. 둘레 550m , 성벽 높이 7m(밖), 2m(안), 성벽 폭 상단부 3m, 기저부 5m, 기와조각(선조문·격자문)과 토기조각(무문·격자문·승석문)등이 출토됨. 성안 남서쪽에 사공바위(남근석 모양)가 있고 10여년전 성안 서남쪽에서 「함통(咸通) 11년 강×대사(康×大寺)」양각 명문 기와 출토로 이미 신라 경문왕 10년(서기 870년)에 「강○대사」란 사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일본서기」에 이 신평현성 기록이 있다.


즉 백제부흥(독립)운동 당시인 서기 662년 2월 2일(음)신라인이 백제의 남부 4주(사평·거열·거홀·덕안 등 4성)에 방화하고 수천명의 백제인들을 살해한 것으로 이 성이 본래 사평성(沙平城 - 신평의 옛이름이 사평)이라고 박성흥 선생(예산, 덕산 읍내, 작고)이 그의 저서와 논문에서 주장함.

7) 운정리 돌미륵
운정리 탑재 미륵댕이 마을소재. 남근석 형태로 높이 217㎝, 두께 70㎝, 얼굴크기 92㎝, 상호(相好)와 의습(衣襲)의 윤곽은 불확실함.


옆의 돌에는 「선덕 삼년 무신 이월일 석×(宣德 三年 二月 日 石×)」란 명문이 음각돼 있어 조선 세종 10년 즉 서기 1428년 (명 선종 3년)에 세운것으로 보며 채웅석 교수(가톨릭대)와 오윤희 교수(한서대)는 이것은 「돌미륵」이 아니고 「매향비(埋香碑)」로 보고 있다.


11. 송악면

1) 의병장 정주원 장군 묘역
가학리 (당재)에 정장군의 묘소가 있다. 정주원(鄭周源:1868~1925)은 본관이 연일, 호는 송운 고대면 용두리 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1907년 8월 경기도 안성시 이죽면 죽산리에 있다가 30여명의 지방의병을 이끌고 양지·양성 2개군을 순회하며 동지 150여명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을 지휘 1907. 8. 25 안성 의병회의에는 의병장 7명, 의병 1만명이 집결했었다.


의병회의 끝난 8월 29일에는 그들 의병규모는 무려 900여명에 도달했는데 정장군은 그들을 3개부대로 나눠 그중 1개부대는 정장군이 직접 지휘하고 경기도 수원군 수하방면에 출동, 그해 11월에는 충청도 당진, 면천, 서산군, 경기도 부천군 등 2개도 각 군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7월 19일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29일 교수형 선고, 그뒤 종신형 감형, 3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옥고치루고 석방, 귀향함. 그후 1925. 1. 22(음) 평택군 오성면 숙성리에서 작고 장례후 현 가학리로 이장함. 필자에 의해 묘소 정화공사와 숭의비 건립 제막식 거행,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당진군에서는 겨우 도로표지판과 현지 안내판만 설치했는데 앞으로 조속한 기간내에 정장군 묘역일대를 애국선열지역으로 고시하고 진입로 개설과 주차장을 시설하여 항일의병장의 참된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신암사
가교리 550소재. 1200년대 창건된 사찰로 신암사금동불좌상은 보물 987호로 지정돼 있다. 기타는 생략함.

3) 구문로 신도비
가교2리 작은절골 소재. 1926년 건립, 흑면장군으로 익찬공신.

4) 구예신도비
가교1리 절골 소재. 1926년 건립. 중대광판전의사 일원 정승. 묘비는 기대승이 지었다. 신도비는 20세손 연창이 짓고 글씨는 권중하가 썼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