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전설 > 이 인 화 /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하성리 반재 마을의 반정치 경치

정미면 하성리에 가면 「반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옛 해미군 염솔면 반정치(半亭峙)지역으로 옛날에는 이정표를 1리(里)마다 혹은 반리(半里)마다 소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어서 표시했는데 이때 반리에 세운 소나무 정자가 있는 고개라 하여 반정치(半亭峙)라고 불렀다.


이곳에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권씨가 낙향하여 99간(間)의 반월정(半月亭)을 짓고 종을 데리고 살았다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주인 권씨는 백간이 넘은 집을 짓고 싶었지만 백간이 넘으면 역적으로 몰린다 해서 99간 집을 지었다 한다.


어느 날 주인 권씨가 집안 종들을 모아놓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종들이 주인 말이 옳다고 머리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반해서 총각 종 하나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돈을 버는 것보다 남의 집 종노릇하기가 더 어렵소이다.”
하고 불평 비슷하게 얘기하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당시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할 뿐이지 반항은 전혀 못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젊은 종이 반발하자 주인은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 힘센 종을 불러
“젊은 종을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거라.”
하였다.

그래서 총각 종은 사랑채 광속에 끌려가서 죽지 않을 만큼 몰매를 맞았다. 매를 때리면서
“네 잘못은 네가 알겠지?”
하고 몽둥이질을 했지만 그는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 끝내 복종을 하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 매를 맞은 총각 종은 광에 갇혀 있었다. 누구하나 어디가 아프냐고 위로하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두침침한 광속에서 정신을 겨우 차리면서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배고픔에 아픔도 잊어버리고 잠이 들었다.


그는 잠을 자다 새벽녘 닭울음소리를 듣고 깼다. 그는 찬바람이 불고 몸이 아파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광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는 나무판목을 판 밥그릇이 들어왔다. 젊은 종은 화가 나서
“밥은 무슨 놈의 밥이냐?”
고 소리치면서 엉금엉금 기어가 밥그릇을 광문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밥그릇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머나!”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분명 주인 딸의 목소리였다.


주인 딸은 어여뻤다. 여자종 가운데 끼여 있으면 몸치장을 한 주인 딸의 용모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총각들은 꼭 저런 처녀와 결혼하고 말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아침 일찍부터 종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광문이 열리며 기운이 장사인 종이 들어왔다.


지금부터 들에 나가 소꼴을 아침나절에 다섯 지게를 해오라는 것이었다. 양을 충당하지 못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까지 늘어놓았다. 총각 종은 소꼴을 베러 가는 사이에 대문을 나서면 아주 도망쳐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총각종 은 광에서 나와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서서 들판을 향해서 걸었다.


그리고 들에 나와서는 으슥한 곳에 지게를 버려두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총각 종은 남쪽으로 달아나서 남해안에 도달했다. 거기서 고깃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갔다. 제주도에서 내려 우선 며칠 동안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장사를 시작해서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장사 밑천을 만들기 위해 배를 타고 해녀 뒤를 따라 다녔다.


총각 종이 도망간 99간 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다. 화가 풀리지도 전에 총각종이 도망간 것을 안 주인은 성을 벌컥 내면서 집에 있는 종을 모두 풀어서 그 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종들은 초립을 쓰고 여기저기를 헤매면서 총각 종을 찾았으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총각 종이 도망가고 나서부터 집 주인 딸이 병석에 눕더니 중병에 걸린 듯 일어나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다. 무당은 총각귀신이 딸에게 중병을 가져오게 했다고 대를 잡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총각귀신은 현재 제주도에 있으니 어서 잡아오지 않으면 딸은 죽게 될 것이라고 풀이를 했다.


주인은 하는 수 없이 그 놈을 내손으로 직접 잡아와야겠다고 행장을 차리고 집을 나서서 한 달 만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주인은 수소문 끝에 총각 종을 잡아서 집에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딸의 중병은 총각 종이 집에 오면서부터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병석에서 일어났다. 주인은 종놈과 딸이 이상한 관계로 발전할까봐 딸의 옆방에 기거를 하면서 젊은 종에게 집안의 어렵고 힘든 일만 시켰다.


그런 날이 한 달이 흘렀다. 하루는 주인집에 먼 곳에 사는 세도가의 둘째 아들한테 혼담이 들어와 집안이 부산했다. 주인은 기분이 좋아서 노상 벙글거렸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총각 종이 부엌 근처에서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데 주인 집 딸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서는 원망스러운 듯 총각 종을 바라보고 어떤 애원이나 하는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총각 종은 나무를 열심히 자르다가 힐끔 쳐다보았다. 주인집 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도망가듯 안채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젊은 종이 나무를 자르고 있는 근처에 딸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본 주인은 맨발로 대청말루에서 아래로 내려오더니 몽둥이로 다짜고짜 총각 종을 힘껏 후려쳤다.


“이놈아, 누가 여기서 일을 하라고 했느냐, 뒤 곁에서 일을 하랬지…”
라고 주인이 나무랐다. 그러자 총각 종은
“여기가 뒤 곁이 아니 옵니까?”
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말대꾸를 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총각은 매를 맞으면서
“내가 어째서 종입니까? 아버지가 종이지.”
라고 하면서 불끈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놈아, 애비가 종이면 자식도 종이야. 내 종이야.”
하면서 또 후려쳤다.
젊은 종은 상기된 얼굴을 하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침 솥에다 소주를 내리느라고 장작이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아궁이에서 불이 붙은 장작을 꺼내 여기 저기 집어 던졌다.

메마른 나무더미에 불이 붙더니 불꽃이 집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붙었다. 집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는데도 그는 미친 듯이 집에서 날뛰며 불을 붙이고 다녔다. 종은 집을 뛰어나와 산으로 올랐다. 99간 집은 활활 타고 있었다.

불길이 수십 리 밖까지 보였다. 마침내 99간 집에 보관하고 있던 남화경의 책이 불길에 솟아올라 덕삼리 간대산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나머지 종들이 불을 끄고서 그를 잡으려고 달려왔다. 젊은 종은 잡히면 이제 자기는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낫으로 목을 찌르고 자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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