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문화원향토사연구위원, 당진시문화관광해설사 남 기은

당진시내를 벗어나 서북쪽으로 가다보면 정미면 천의리에 이른다. 이곳 정미농협주유소 옆에는 태극기 여러 개가 길옆으로 서 있고 입석기념탑이 있으며, 그 언저리에 석물구조가 서있다.  4ㆍ4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다.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듯한 석물 구조다. 또한 대호지면 조금리의 면사무소 앞에는 1972년 3월4일 건립된 3ㆍ1운동 순국선열 영세추모비가 서있다. 그리고 대호지 면사무소에서 사성리 방면으로 100m정도 가다보면 길 옆에 여러 개의 태극기와 창의사가 있다. 창의사에는 대호지를 중심으로 당진지역  3ㆍ1운동에 참여하였던 애국지사 603위 위패를 모셨다. 마지막으로 대호지면 도이리에는 충장사가 있다. 우리고장 충절의 표상인 남이흥장군 위패가 봉안된 이곳에는 지붕 없는 박물관을 연상케 하듯 다양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남이흥장군의 유물을 보관중인 모충관에는 4ㆍ4 독립만세운동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남상락 자수태극기(사본, 진본은 독립기념관에 보관)가 있다. 모두가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나라사랑 유물들로 생각된다. 
현재 가장 권위있는 사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4ㆍ4 독립만세운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남상락외 4명은 서울 파고다 공원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챙겨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규모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대호지 유생들이 고종의 인산(장례)에 참여한 후 서울에서 전개된 3ㆍ1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갖고 귀향하여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1919년 4월 4일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였던 대호지면 유림들은 우선 대호지면의 이인정면장을 설득하여 만세운동의 핵심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대호지면의 행정력을 조직운영에 활용하였다. 이들은 만세운동 당일, 도로보수를 명목으로 대호지면 모든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4월 4일, 면내 주민들의 신분과 종교를 초월하여 전주민이 대호지면사무소앞 광장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유림대표인 남주원, 대호지면장 이인정을 필두로 장이 서고 있던 정미면 천의리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도로보수를 위해 참여했던 조금리, 사성리, 적서리, 도이리 주민들도 만세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후 적극적으로 앞장섰고, 7㎞에 이르는 천의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나온 두산리, 장정리, 송전리, 출포리, 마중리 지역 주민들도 가세하였다. 이들이 정미면 천의리에 도달하자 군중은 어느덧 1,000여명에 이르렀다. 주민들의 만세시위에 놀란 일제는 가까운 당진경찰서에 도움을 청했고 헌병대파견을 요청하였다. 처음에 주민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기본으로 독립만세만을 고창하였다. 하지만 일제 헌병경찰의 태극기 탈취와 무단적인 시위진압에 격분한 주민들은 보다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천의주재소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일본 경찰을 내몰았으며 당진에서 파견나온 경찰을 무력으로 공격하였다. 또한 평소 일본경찰의 후원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던 일본인의 집을 부수고 각종 기물을 탈취하였다. 1919년 4월 4일 천의장터의 시위대 주민들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 감격을 열광적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의 처절한 보복은 그날 밤부터 진행되었다. 대운산교 보수를 지연시킨 이연종 대운산리 이장의 노력으로 일본군 진입은 늦추어져 초동진압에는 실패하였지만, 대호지면 조금리로 들어온 헌병대는 더욱 악랄하게 주모자들을 수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송봉운은 일제 헌병에 총살되는 만행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일제에 맞서 끊임없이 항쟁하였고 며칠 동안이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2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서산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구속된 주민들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 중에 김도일, 박경옥, 이달준 등 3명 애국지사는 옥중순국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마쳤으며, 송재만은 징역 5년, 민재봉, 김순천은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그 외에 징역 1년 28명, 징역 8월 8명, 태형 90도 88명 등 일제의 『형사사건부』에 등장하는 애국지사는 총 199명에 달한다.
그 후 애국충혼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만세운동 53년 만에 1972년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독립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구전으로 전해 오던 대호지 4.4 사건 기록물이 부산검찰청에 보관되었음을 확인하고, 1982년 당시 한전 전무로 근무하던 남만우씨가 사건기록물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물은 당시 대호지 면사무소 직원인 남기호씨에게 전달된다.   이와 같이 사건 기록물을 바탕으로 대호지면 조금리에 창의사를 건립하게 되었고 당시 운동을 상기하고 나라사랑을 기리고자 대호지 만세운동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경건한 마음으로 계승되어 오던 행사가 요즈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절감한다. 한 행사를 놓고 정미 행사 현수막이 다르고  대호지 현수막이 다르다. 그 뿐인가, 몇 년 전부터 개회식이 대호지 창의사에서 하고, 천의 4.4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앞 광장에서도 개회식을 한다. 도대체 이게 웬 말인가. 일부 면에서는 면민의 날 이라 정하여 기념탑 앞 광장에서 노래자랑까지 한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나라를 찾고자 살점이 묻어나고 뼈가 부러지고 무수한 고문에 감옥에서, 또 옥중에서 죽어간 애국 충혼을 위로하기 위한 진실된 마음의 표현인가? 진정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당진의 덕망 있는 단체 jc.특우회 회원님들이 모두모여 수년간4.4만세운동 행사에 열과 성을 다하여 주관하여 오다 정미면 대호지면 주민들의 분열된 모습을 지켜보고 주관행사를 포기 했다. 이젠 더 이상 창피해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행정 책임자 또는 정미. 대호지 행사 책임자 분들의 아들 손자가 구경 와서 “이렇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거여요?” 하고 물어온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이며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역사학자에게 어떻게 써서 기록하라고 할 것인가? 애국 영령이 진정 있다면, 그 고통 속에 죽어간 애국 충혼이 있다면 이러한 행사를 반가워 할 것인가?
정미 대호지 행사책임자들은 진정 가슴깊이 다시 한번 생각하여 순리와 정도를 찾고, 한계를 재정립하여 화합의 장으로 부끄럽지 않은 행사로 이어지길 간곡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다.
첫째, 천안 목천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과 동일하나 그 유명한 곳처럼 이곳은 행위를 한 장소로 명분이 있으니 정미면 천의에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양보하시어 정미면 대호지면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으시고 임하여 주시길 것을 당부 드린다.
둘째, 창의사에는 현재 대호지에서 시작했던 시위주도층과 주민 573명의 위패가 봉안함으로써 출발하였으나 후에 정미면 주민인 정원환, 이연종, 그리고 면천공립보통학교 3ㆍ10 독립만세운동의 주인공인 박창신, 원용은 등이 추가되어 모셔져 있다. 결국 창의사는 현재 603위 애국충신 위패가 봉안됨으로써 당진지역 3ㆍ1운동의 관련자가 총망라되어 배향되어 있다. 결국 창의사는 대호지면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대호지면 주민들도 정미면과 대호지면은 하나라는 마음을 갖고 임하시길 당부 드리고 싶다.
셋째, 담당 주무관은 정미면 대호지면 하나의 행사로 일원화하고 행사계획서를 사전에 받아 행사지원금이 행사 컨셉에, 또 격에 맞게 지출되게 하고, 자방자치시대 사소한 인정에 이끌려 난무한 지원금은 절제되어야 한다.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일원화하여 한곳으로 행사비를 지급하고  화합과 우애의 장이 될 수 있는 프로를 추가하여  명분있고 부끄럽지 않은,  타 시군에서도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행사가 되도록 주문드리고 싶다.
일제강점 35년 동안,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픔을 뼈아프게 느꼈던 3,000만 온 국민이 모두의 마음은 독립과 광복을 염원했었을 것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우리와 같이 작고 외진 마을에서도 4.4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음을 긍지로 여기면서, 후손 만대에 기록될 자랑스러운 유산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를 용서하고 포용하고 화합하는 정미면 대호지면의 4.4독립만세운동 행사가 통합된 행사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주문하며 이에 기고를 마친다
*참고 문헌: 항일독립운동사(박상건), 해강선생유집(남중우),
           4.4 만세운동학술고증용역보고서(충남대학교 충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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